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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S가 고장나면 길을 잃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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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선데이국장

예영준 선데이국장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외교 무대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 중에 GPS란 말이 있다. 윤 대통령이 국정 목표로 내건 글로벌 중추국가(Global Pivotal State)의 영문 이니셜이 위성항법장치의 이니셜과 일치한다는 점에 착안해 윤 대통령과 박진 외교장관 등이 기회 있을 때마다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엔 ‘고장난 GPS’란 말이 나온다. 경위는 이렇다.

지난 16일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는 러시아에 강제 병합된 크림반도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한 규탄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져 찬성 78, 반대 14, 기권 79로 채택됐다. 2016년 이후 해마다 11월 같은 결의안이 올라와 표결로 채택되는 관례대로의 일이다. 한국이 기권표를 던진 것도 해마다 마찬가지다. 하지만 달라진 사정은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교체돼 글로벌 중추국가를 목표로 삼고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중시하는 국정기조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인권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표방한 데 있다. 윤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은 한반도 중심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중시하고 국제사회에서 선진국 대접에 걸맞은 역할을 하겠다는 공약이었다. 외교부 당국자가 “기권이 더 많지 않냐”고 한 것은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망각한 발언이었다.

“보편 규범, 인권 중시” 공약해 놓고
크림 결의, 신장 규탄서 모두 빠져
“한국은 압박 통하는 나라” 자처 꼴

유사한 일,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일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유엔총회 제3위원회는 중국 신장 위구르 인권탄압 규탄 성명을 발표했는데, 미국·영국·일본·호주 등 자유민주 진영 50개국이 참여했다. 한국은 이 명단에 없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별반 새로울 것도 없다. 문제는 그보다 앞선 지난달 6일 신장 위구르 인권 문제와 관련한 유엔 인권이사회의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진 것에서 20여 일 만에 정반대로 방향을 틀었다는 데 있다. 같은 유엔에서 같은 내용을 놓고 한쪽에선 찬성하고, 다른 한쪽에선 슬그머니 빠져버린 것이다.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난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있었던 한·중 정상회담과 연관해 생각하면 그 내막이 눈에 들어온다. 인권이사회 신장 위구르 인권 토론회 개최에 한국이 찬성하자 중국의 강한 압박이 들어왔다. 전례로 볼 때 중국은 한·중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고 압박 카드로 활용했을 것이다. 정상회담을 기필코 성사시켜야 하는 외교부 실무진의 입장에선 더욱 더 수세에 몰렸을 것이다. 비슷한 무렵 방한하려던 폴란드 국방장관 전용기의 영공 통과를 중국이 거부하는 일도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한·중 정상회담은 성사됐고, 한국 정부는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보다는 만남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발리와 방콕에서 열린 다자회의에 참석한 길에 지난 3년간 코로나로 중단한 정상외교 공백을 일거에 만회하듯 19개국 정상과 회담을 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나라 정상들을 주로 만났다. 만일 한국이 신장 인권 규탄 성명에 동참했다면 한국을 ‘왕따’시켰을지, 아니면 그래도 회담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런 식으로 같은 사안에 대해 한국 입장이 왔다갔다하면 중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고심이야 있었겠지만 입장을 뒤집는 건 아주 안 좋은 일이다. 중국에 한국은 압박이 통하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신장 인권에 관한 유사한 기회가 다시 올 텐데, 그때 찬반 중 어떤 입장을 취하건 한번 훼손당한 한국의 일관성과 신뢰를 회복하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적어도 신장 이슈에 관해서만은 한국은 카드를 하나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가치외교와 GPS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것을 일관되게 지켜나갈 의지와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허한 구호에 그치고 만다. GPS가 고장나면 운전자는 길을 잃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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