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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강제 징용’ 성급한 성과보다 국내 설득에 눈 돌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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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로드맵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일 정상은 지난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회담했다. 2019년 12월 이후 약 3년 만에 열린 정식 정상회담이다. 회담 이후 대통령실은 보도자료를 내고 “두 정상이 양국 간 현안과 관련해 외교 당국 간에 활발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음을 평가하고 조속한 해결을 위해 계속 협의해 나가자고 했다”고 밝혔다. 이 회담에서 현안인 징용자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성과를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대통령실은 양국 실무진 사이에 징용자 문제 해법이 한두 개로 좁혀지고 있으며, 이를 가지고 양국 정상은 문제를 신속히 풀어가자는 데 의기투합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출범 이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윤석열 정부의 부단한 노력이 종착점에 다다랐다는 희망이 엿보였다. 올해가 가기 전에 ‘징용자 합의’가 발표될 듯한 인상을 받았다. 분명 징용자 문제는 해결의 문턱에 가까이 왔다. 그러나 문턱 너머 나타난 문이 ‘천국의 문’인지 ‘지옥의 문’인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의 악몽이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일 정상, 지난 프놈펜 회담에서 징용자 문제 조속 해결 합의
피해자·야당 설득 없인 진보·보수 역사전쟁으로 번질 수 있어
대일 경제·안보·교류와 과거사 화해라는 두 바퀴를 함께 굴려야
정부 차원 한일화해위원회 필요…미래 세대에 큰 길 열어줘야


‘천국의 문’ vs ‘지옥의 문’

윤석열 대통령(왼쪽)이 지난 13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왼쪽)이 지난 13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정부 때 닫혀버린 한·일 외교를 재개하고자 윤석열 정부는 진심을 담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피해자 측의 견해를 확인하며 그들과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하는 한편, 일본을 상대로 빈번한 실무자 교섭과 고위급 회담을 거듭하면서 상호 신뢰의 기반을 차근차근 쌓음으로써 마침내 정상회담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민관협의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는 4차에 걸친 협의회를 통해 기본안을 마련했다. 기존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주체가 되어 한·일 양국 기업으로부터 기금을 모아 대위변제한다는 것이다. 이 안이 합의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하나는 일본 정부·기업의 사죄 표명과 일본 기업의 기금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자의 동의다. 바로 이 두 조건이 문턱 앞에 버티고 있어 양국 정상은 프놈펜 정상회담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문턱을 넘고 싶은 윤 대통령과 문턱을 넘을지를 고민하는 기시다 총리 두 사람이 공유한 인식의 산물이 정상회담 직후에 제공된 보도자료의 짧은 문안이다.

윤 대통령은 일본 측의 기금 참여와 사죄 표명을 들고 피해자의 동의를 구해 대법원 판결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수출 규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위안부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해결하고, 한·미·일 삼각 협조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그 성과를 바탕으로 난맥처럼 흩어진 내치에 매진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반면 기시다 총리는 한국 측의 진심을 담은 화해의 손을 선뜻 잡지 못하고 있다.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일본의 일관된 기존 주장을 철회해야 할 뿐 아니라, 설사 양보해서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의 정권이 바뀌면 번복될 수 있다는 위안부 합의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의 우려를 불식시켜 줄 묘약이 없는 한 징용자 합의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애매한 타협은 또다른 갈등 낳아

지성이면 감천이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한국 측의 지속적인 구애에 결국 일본이 호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이 결단해도 문제는 디테일에 남아 있다. 합의 내용을 각자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애매한 타협이 된다면 갈등의 씨앗이 된다. 피해자가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명백한 표현이어야 하고, 이면 합의가 존재해서도 안 된다.

천신만고 끝에 합의에 이른다 해도 또 다른 문제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지난 10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한 간담회에서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위 부위원장인 박형래 변호사가 병존적 채무 인수를 통한 대위변제도 채권자인 피해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민관협의회에 참석했던 그의 이러한 주장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대위변제를 시행하려는 정부 안과 배치된다. 간담회에서 정부 간 합의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와 명분이 제시됐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한국 정치 상황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여야 간의 사법 전쟁, 이태원 참사 사태 처리를 둘러싼 정권 퇴진 시위 등 진영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만약 여기에 징용자 문제가 진영 간 역사 전쟁으로 비화한다면 그 폭발력은 막대할 것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윤 정부에게 성급하게 가시적 성과를 내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 섣불리 문턱을 넘기보다는 재촉하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깊이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한국은 일본에 충분히 성의를 다했다. 한국 측의 입장과 성의 있는 호응 요청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지속해서 전달했다. 저자세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뉴욕에서 기시다 총리와의 약식회담을 가졌고, 욱일기 경례가 굴욕적이라는 논란을 무릅쓰면서 일본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도 참가했다.

국민 전체에 대한 설명 과정 필수

그러나 정작 국내 구성원을 향해서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진정성을 갖고 최선을 다해 피해자를 설득했는가. 야당에 협조를 요청했는가. 국민에게 설명했는가. 지금은 일본을 설득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겠다는 유혹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고, 방향을 국내로 돌려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설득하고 호소해보기를 권한다.

“친애하는 피해자 어르신, 야당 의원, 그리고 국민 여러분, 정부 출범 이후 징용자 문제 해결을 위해 사력을 다한 결과 마침내 정상회담까지 가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일본은 성의 있는 호응을 전해오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일본의 호응을 기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정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과거 우리 정부가 부족하고 미력하여 피해자들의 한(恨)을 충분히 풀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가슴에 남아 있는 그 한을 우리 정부가 정성을 다해 풀어드리기 위해 ‘포스코 역사기념 의식’을 구상했습니다. 청구권 자금과 일본 기업의 기술 지원으로 건설된 포스코 현장은 극일(克日)의 자랑스러운 장소입니다. 포스코의 위대함이 피해자분들의 땀과 피와 눈물의 대가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포스코 내에 추모 공간을 조성하고 선언문과 피해자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세워 피해자분들을 모시고 온 국민이 경축하고자 합니다. 정치 협상을 통해 총액 결정 방식으로 수령한 청구권 자금에는 강제동원 피해 보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성격의 자금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할 도의적 책임에 따라 1975년 박정희 정부에서 첫 피해자 보상을 했고, 노무현 정부는 오랜 기간 고통을 겪어온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도의적·원호적 차원과 국민 통합의 측면에서 2차 보상을 했습니다. 이제 윤 정부는 역대 정부의 방침을 계승하여 3차 보상을 하고자 합니다. 3차 보상이 시행되면 피해자분들은 대법원 판결로 획득하신 채권을 정부에 양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부는 일본과 협의해가며 정의롭고 당당하게 처리하여 결코 피해자분들에게 또다시 한을 남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투 트랙’ 성과 없어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문희상 전 국회부의장을 일본 특사로 파견했다. 당시 문 특사는 기시다 외무상에게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할 수 없지만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한·일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맺어나가길 희망한다고 전하며, 투 트랙으로 한·일 관계에 임하겠다는 방침을 전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내내 투 트랙은 작동하지 않았다.

프놈펜 정상회담에서 경제·안보·인적 교류라는 한쪽 바퀴가 굴러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화이트 리스트와 지소미아 문제를 종결짓고, 전 분야에 걸친 협력을 확대해가자. 이와 동시에 국내적 설득을 바탕으로 역사 화해라는 다른 쪽 바퀴도 서서히 굴려보자.

202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이 있었던 1998년으로부터도 한 세대가 지났다. 이제 중장기 로드맵을 갖고 새로운 한·일 시대를 열어가자. 이를 위해 대통령 혹은 총리 산하에 ‘한일화해위원회’를 설치하여 일본과 긴밀히 협의하며 역사 화해를 추진해 나가자. 피해자의 바람을 깊이 명심하고, 반드시 여야 합의를 기반으로 하여, 양국의 미래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는 방향으로 과거사 문제를 처리하자. 그토록 높아만 보이던 문턱 앞에서 주저하고 갈등하던 양국이 그 문턱을 훌쩍 넘어 동아시아 지역 협력과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조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되기를 고대한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