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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스테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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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부 차장

조현숙 경제부 차장

기획재정부에서 있었던 일이다. 새로 발령받은 직원 하나가 빨리 보고를 하러 들어오라는 A국장 호출에 급하게 국장실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본 국장은 “슬리퍼를 신고 보고를 하러 들어오다니 말이 되냐”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신고 있던 슬리퍼를 미처 구두로 갈아신고 오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리고 국장의 일갈이 이어졌다. “다시는 내 방에 보고하러 들어오지 마.” 엄포가 아니었다. 그 직원은 대면 보고에서 배제됐고 요직이었던 해당국에서 밀려나야 했다. 이후 장관으로 승승장구한 A국장의 ‘지엄함’을 알려준다며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재부 모 과장이 전한 일화다.

공직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엄중하긴 하지만 그래도 10여 년 전 옛날얘기다. 여름이면 샌들을 신고 반바지도 입는다는 한 ‘에이스’ 과장을 두고 상관들이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니 말이다. 공식 보고나 국회 일정이 있으면 정장에 구두를 갖춰 입는 게 당연하지만, 슬리퍼 갈아신는 걸 깜박했다고 해서 멀쩡히 일 잘하는 직원을 날려버릴 간 큰 국장은 이제 없을 거다.

대통령실이 도어스테핑 중단을 공식 선언한 지 9일째다. 때아닌 슬리퍼 논란도 여전하다. 지난 18일 윤석열 대통령의 도어스테핑 후 대통령실 비서관과 설전을 벌인 기자가 슬리퍼를 신었다는 걸 두고 진영 간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슬리퍼를 탓해봤자 논점 이탈이다. 비속어 보도와 전용기 탑승 불허 논란의 연장 선상인 건 모두가 안다.

도어스테핑은 말 그대로 문(door) 앞에서 걸어 나가며(stepping) 하는 돌발 인터뷰다. 집이나 사무실 앞에서 한참 대기하다가 문밖으로 취재원이 나오면 붙잡고 물어보는 걸 말한다. 언론계 은어 ‘뻗치기’와 오히려 통하는 용어다. 각본이 없으니 당연히 불편한 대화가 오갈 수밖에 없다.

반듯한 정장과 구두 차림에 팔짱을 끼지 않고 정제된 어투로 질문하는 기자를 원한다면 물론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기자가 이미 따르고 있는 관행이다. 그러나 약식이든 공식이든 일방적 얘기를 듣거나 덕담이나 나누자고 하는 기자회견이란 없다. 불편한 질문과 논쟁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다. 도어스테핑을 재개하든 안 하든 변함없는 언론의 공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