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게 월드컵…아르헨 꺾은 사우디, 8년간 싸운 반군도 축하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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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빌미

1969년 7월 14일, 엘살바도르가 전격적으로 온두라스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온두라스에 거주하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동안 양국은 전쟁으로 풀어야 할 만큼 쌓인 감정이 많았다. 기습의 효과에 힘입어 엘살바도르로가 초반에 우세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이 정체됐다. 이때 미주기구(OAS)가 개입하며 7월 18일 정전이 이뤄졌다. 이처럼 나흘 동안 벌어져서 100시간 전쟁이라고 한다.

양측 합쳐 3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나왔을 만큼 비극적인 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단지 군사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기간이 짧은 데다 규모도 작아서 제한적인 분쟁 수준이다. 20세기에 벌어진 수많은 여타 전쟁들과 비교한다면 어쩌면 소소한 사건으로 취급될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 전쟁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축구전쟁(Guerra del Futbol)’으로 더 많이 알려졌을 만큼 축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온두라스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중미 최종 예선 1차전의 모습. 사이가 나빴던 두 국가가 세 차례의 경기를 치르면서 상대에 대한 증오심이 증폭되었고 결국 전쟁을 벌였다. 트위터

온두라스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중미 최종 예선 1차전의 모습. 사이가 나빴던 두 국가가 세 차례의 경기를 치르면서 상대에 대한 증오심이 증폭되었고 결국 전쟁을 벌였다. 트위터

그것도 4년마다 지구인을 미치게 만드는 FIFA 월드컵(월드컵)과 관련이 많다. 양국은 제9회 멕시코 대회 중미 예선 최종전에서 맞섰다. 앞서 언급처럼 워낙 사이가 나쁘다 보니 양국을 오가며 벌인 경기는 상당히 치열했다. 반칙이 난무한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원정 응원단이나 자국에 거주하는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까지 자행될 정도였다. 결국 제3국에서 최종전까지 벌이며 승패를 갈랐다.

축구전쟁 당시 엘살바도로군을 선봉에서 이끈 호세 메드라노. 온두라스에서는 침략자의 수괴로 엘살바도르에서는 학살당하는 자국민을 구한 영웅으로 여겨진다. 위키피디아

축구전쟁 당시 엘살바도로군을 선봉에서 이끈 호세 메드라노. 온두라스에서는 침략자의 수괴로 엘살바도르에서는 학살당하는 자국민을 구한 영웅으로 여겨진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단교까지 할 만큼 예선전을 치르면서 양국 국민이 격앙됐고 결국 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 갈등이 많이 내재한 상태이기는 했어도 어처구니없게도 월드컵이 전쟁의 도화선이 돼버린 셈이었다. 결과론이지만 당시 정황상 경기가 없었다면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전쟁을 벌일 구실이 될 만큼 축구에 흥분하는 이가 많고 그중에서도 월드컵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의미다.

월드컵은 내셔널리즘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엄청난 경쟁의 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전체주의 이미지가 연상될까 우려해서 국가나 민족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는 독일 같은 경우도 월드컵에서만큼은 예외일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축구가 전쟁의 구실이 됐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 없는 엄청난 잘못이다. 오히려 건전한 경쟁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월드컵의 진정한 목적이다.

평화의 도구

실제로 월드컵을 매개로 전쟁이나 분쟁을 멈춘 사례도 있다. 2002년 제17회 한국-일본 대회에서 브라질이 우승하자 카리브 해의 섬나라인 아이티가 이틀간 국가 휴일을 선포했다. 그 정도로 인기가 대단한 브라질 대표팀이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의 인솔로 2004년 현지를 방문해 아이티팀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당시 브라질은 내전 중이던 아이티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했었는데 치안 유지에 애를 먹자 자국 대표팀을 동원한 것이었다.

이때 브라질은 무장 세력들에게 불법 무기를 반납하면 입장권을 준다는 흥미로운 미끼를 내세웠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적대시하며 싸워왔기에 무기 회수율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브라질 대표팀 방문 기간만큼은 무장 세력 간의 교전이 없었다. 경기 당일에는 경기장과 그 주변에 무려 10만의 관중이 운집했음에도 오로지 좋아하는 브라질팀을 응원하는 함성만 있었을 뿐이었다.

UN 평화유지군 장갑차를 타고 시내 퍼레이드중인 브라질 대표팀을 환영하는 아이티 시민들. 2002년 월드컵 우승팀의 방문으로 잠시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브라질 축구협회

UN 평화유지군 장갑차를 타고 시내 퍼레이드중인 브라질 대표팀을 환영하는 아이티 시민들. 2002년 월드컵 우승팀의 방문으로 잠시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브라질 축구협회

2006년 제18회 독일 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코트디부아르팀 주장인 디디에 드로그바가 내전 중인 모국의 현실이 슬퍼서 전쟁 관계자들에게 경기 기간만이라도 싸움을 중지해 달라고 카메라 앞에서 애원했다. 결국 그의 노력이 받아들여 총성이 극적으로 멈추는 기적이 연출됐다. 비록 일주일의 짧았던 휴전이었지만, 자국 출신 슈퍼스타의 호소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TV에 출연해 무릎을 꿇고 전쟁 중지를 호소하는 디디에 드로그바. 그의 절규가 커다란 울림이되어 월드컵 기간 중 일주일간 내전이 멈추었다. StMU Research Scholars

TV에 출연해 무릎을 꿇고 전쟁 중지를 호소하는 디디에 드로그바. 그의 절규가 커다란 울림이되어 월드컵 기간 중 일주일간 내전이 멈추었다. StMU Research Scholars

올해 제22회 카타르 대회에서도 그런 좋은 풍경이 보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를 격파하는 이변이 나오자 세계인이 열광했다. 많은 곳에서 축하가 답지했는데, 그중에는 지난 4월에 휴전할 때까지 8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전쟁을 벌였던 예멘 후티 반군 지도자까지도 있었다. 이런 사례들이 바로 월드컵의 진정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대회 때는 참가국을 모으기 급급했을 정도로 조촐하게 출발한 월드컵은 어느덧 세계인이 즐기는 거대한 축제의 장이 됐다. 본선에 참가하지 못한 나라의 시민이라도 단지 축구가 좋기에 경기를 보고 즐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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