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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수의 퍼스펙티브

효력 다한 제왕적 대통령제…개헌으로 협치틀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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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시대와 맞지 않는 1987년 헌법

이상수 헌법개정국민주권회의 상임대표·전 노동부 장관, 리셋 코리아 개헌분과장

이상수 헌법개정국민주권회의 상임대표·전 노동부 장관, 리셋 코리아 개헌분과장

2016년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광화문 사거리에 촛불을 들고나온 시민들의 함성 속에는 대통령 한 사람 몰아내자는 외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라다운 나라,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절박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지난 6여년간 적폐 청산을 둘러싼 소모적인 대립과 권력 쟁탈을 위한 지속적인 싸움으로 개혁다운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광화문의 촛불은 발화되지 못한 채 미완의 횃불로 사그라지려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광장 민주주의를 숙의 민주주의로 발전시켜 제도화하자는 국민적 염원이 무산되고 있다.

진영 논리와 팬덤이 지배하는 싸움판으로 전락한 정치권
갈등의 근본 원인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승자독식 구도
다음 총선 전까지 개헌안 만들고 국민공론화위 구성을
국회 개헌특위 활동과 국민 의견 수렴 작업 병행해야

미국의 초당파 싱크탱크 퓨리서치센터는 최근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19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한국이 ‘정치적 갈등 주요국 1위’로 꼽혔다. 우리 정치가 어떤 수준에 있는가 보여준 확실한 징표다. 정치만 잘되면 경제도 안보도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있는데 정치가 문제라는 목소리가 높다.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호가 난파 위기 속에 침몰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집이 썩어 무너져 내리는데 지붕이나 서까래 정도 고쳐서 될 일이 아니다. 주춧돌을 다시 놓고 기둥과 대들보를 새로 세우는 대공사가 필요하다. 현재 헌법은 35년간 바뀌지 않아 너무 낡았다.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은 과감하게 벗어 버려야 한다. 미래를 향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 이 국면을 뛰어넘어야 한다.

‘분권과 협치’는 시대의 요구

이상수의 퍼스펙티브

이상수의 퍼스펙티브

지금의 정치판은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와 희망을 찾는 경쟁의 장이 아니다. 모두가 다음 선거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죽기살기식 싸움만 벌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진영 논리와 팬덤만 지배하는 싸움판이 지속할 것이다. 무엇보다 갈등과 대립의 근본 원인인 제왕적 대통령제의 승자독식 구도부터 깨고 권력 구조를 바꿔 상생·협치가 지배하는 합의제 민주주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를 만들고 기득권 양당 구도도 혁파하여 소수당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연합 정부식 합의제 민주주의를 실시해야 한다. 독식하는 시대는 지났다. 권력을 나누어 함께 행사하는 ‘분권과 협치’의 권력 구조를 만들어 힘을 모으는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개헌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다른 문제가 생기면 개헌 논의를 뒷전으로 미뤄왔다. 그동안 개헌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변수였다. 정치권에는 개헌은 먹고 싶을 때 꺼내 먹는 곶감 같은 존재였다. 더 이상 개헌은 기득권 여야 정치권 이해에 맡길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나서 주도하며 추동해야 할 사안이다.

국회 개헌특위가 성공적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개헌절차법을 제정하여 절차적 이행을 담보 받아야 한다. 그다음 국회 내에 공정하고 독립적인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여 실체적 내용을 보장받는 제도적 안전판이 필요하다. 그동안 개헌 논의가 무수히 전개되어 이제 선택의 문제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듯 정파적 이해관계가 마지막 결단을 주저하게 하고 있다. 끝내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국민 참여 개헌을 통해 돌파해야 한다.

우선 개헌절차법을 내년 초 개헌특위 출범과 함께 제정하여 그 법에 따라 다음 총선 전에 개헌안을 만들어 통과시켜야 한다. 19대 대선 때 대선후보들이 헌법 개정을 약속했으나 공수표가 됐다. 이제 법으로 확실히 약속하고 법 절차에 따라 개헌을 진행해야 한다. 개헌절차법 통과로 개헌 로드맵이 확실히 보이면 정치권도 미래 전망을 공유하며 당면한 민생 현안 해결을 위한 협치의 리더십도 갖게 될 것이다.

민생 해결과 병행해 개헌 논의해야

또 개헌절차법에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여 국민이 원하는 국민 참여 개헌 작업을 특위와 병행해 나가도록 규정해야 한다. 특위가 개헌안을 만들면서 중요하거나 합의가 어려운 부분은 공론화위원회를 두어 그 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헌법 개정은 정치적 타협을 통해 시대 의지를 확인해내는 어려운 작업이다. ‘성숙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조직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국회 개헌특위에 ‘숙의민주주의의 공론장’을 만들어 운영할 것을 제안한다. 공론화위원회를 중립적인 시민 대표로 구성하여 학습과 토론을 통해 국민이 원하는 개헌안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공론화위원회는 국회 특위가 구성하되, 산하에 일정 원칙에 따라 무작위로 추출된 ‘국민 배심원단’과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위원회’를 둔다.

공론화위원회는 철저하게 절차 관리에 집중하며 참여 국민의 의견을 공정하게 집약시켜야 한다. 공론화위원회의 투명성·공정성·전문성은 개헌 공론화의 성패를 좌우한다. 국민 배심원단은 공론화 과정 내내 전문가위원회로부터 충분한 설명과 자료를 받으며 학습과 토론을 통해 주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최종적인 결정을 도출해 낸다. 또 전문가위원회는 국민 배심원단의 학습과 논의 과정을 함께하면서 자문단의 역할을 수행한다.

온라인 플랫폼에 ‘개헌 장터’를 설치해 원하는 국민은 의견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전 국민이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국민 배심원단의 논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국민 배심원단이 온라인 공간에 나타나는 국민 의견을 참고하면 상호 피드백이 가능해져 공감대를 높일 수 있다. 숙의(熟議)란 이렇게 자유로운 참여와 반복적 상호작용을 통해 학습의 깊이를 더하며 애초에 가졌던 자기 생각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국민 배심원단이 다룰 의제는 지금까지 오랜 기간 쌓아온 개헌특위 등 논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문가위원회가 선정하되 정부 형태, 사회적 기본권의 확충 범위, 지방정부의 입법·재정권 확대 등 의견이 대립된 중요 사항에 논의가 집중되도록 의제를 줄여 선택과 집중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국회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국민의 집약된 의사를 최대한 존중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 교착된 상황을 타개해 국민 참여 개헌을 성취하기 위해 특위의 기득권 일부를 내려놓고 대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 신고리 원전 공론화 결과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처럼, 국회도 여야 합의를 통해 공론화위원회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헌법 개정은 블랙홀과 같아 다른 일을 모두 빨아버려 중단시켜버리니까 집권 초인 지금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있다. 개헌을 블랙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헌과 같이 중요하고 많은 시간이 걸리는 큰 문제는 단계적 처리가 아닌 병행적 처리로 충분히 논의되어야 한다. 한쪽에서는 경제나 민생 문제를 처리하는 데 전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 헌법 개정 문제를 논의하면 된다.

정치권은 개헌 로드맵 만들어야

임기 중 개헌을 하여 바로 실행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음 총선 전까지 개헌은 하되, 그 시행 시기는 사안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여야 대표들은 개헌특위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등 다른 일이 생겼다고 하여 개헌 논의를 미루지 말고 병행적 사고를 발휘하여 개헌특위는 예정대로 진행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 개헌 로드맵을 만드는 것 자체가 국정의 진정한 위업을 달성하는 실마리가 된다.

정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그 실천을 추진하는 힘이 권력욕인데, 그 권력욕은 높은 뜻과 깊은 철학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의 생물학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높은 뜻은 민족과 조국의 내일을 걱정하는 마음이요, 깊은 철학은 오늘의 현실을 분석하고 투시하는 힘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각 분야에 경륜과 포부를 지닌 훌륭한 인재들이 많다. 문제는 이들의 힘을 모아 민족 발전의 충전로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 개헌 독립군이라도 결성하여 무소의 뿔처럼 나아갔으면 좋겠다.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뛰어넘어 공통의 대의를 만들어내어 다시금 희망과 번영의 새 질서를 열어야 한다. 뿔뿔이 흩어져 개인이나 정파적 이익만을 위해 달려갈 때 우리가 도달할 목적지는 어디이겠는가.

이상수 헌법개정국민주권회의 상임대표·전 노동부 장관, 리셋 코리아 개헌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