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은식이 고발한다

北서 건너온 후진국병 말라리아 …'에르메스 말안장'에 격분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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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경기도·인천시 등이 북한에 말라리아 방역 물자(살충제)를 보낼 때의 모습. 왼쪽 위는 국내의 주요 말라리아 발생 지역 표시도. 그래픽=박경민 기자

2011년 경기도·인천시 등이 북한에 말라리아 방역 물자(살충제)를 보낼 때의 모습. 왼쪽 위는 국내의 주요 말라리아 발생 지역 표시도. 그래픽=박경민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 수사 도중 해외로 도피한 쌍방울 김성태 전 회장이 문재인 정권 때인 지난 2019년 대북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북한에 프랑스 최고급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의 말 안장과 150만 달러를 건넨 정황이 포착됐다는 언론 보도를 최근 접했다. 또 당시 집권당이었던 몇몇 야당 인사가 관련됐다는 정황 역시 나와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 사건은 과거의 여러 남북 협력 사업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단 내세운 대의명분은 이번에도 똑같다. 김대중 정부 이래로 주로 진보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남북 경협은 늘 민족의 평화라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업을 빌미로 우리가 찔러주는 뒷돈이 핵심이었다. 그 결과 실질적인 남북 평화는 물론 북한 주민의 생활고와 같은 난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북한 최고위 집권층의 배만 불려준 실패로 귀결됐다. 쌍방울이 북한에 제공했다는 뇌물도 아마 비슷한 결말을 맞을 것이다.

여기서 과거와 달리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바로 김 전 회장이 소속 임직원을 동원해 직접 북한 측에 전달했다는 에르메스 말 안장이다. 사실이라면 우선 대북 사치품 반출을 금지한 유엔의 대북 결의 1718호 위반이다. 게다가 즉각적으로 그 돈의 쓰임새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외화와 달리 최대 수억원에 달한다는 이 말 안장은 북한 주민과 무관한 집권층의 사치 성향을 그대로 노출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란거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종종 타는 백마 위에 얹기 위한 것이든, 혹은 그가 다른 고위층에게 주려 한 선물이든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의 삶과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여주는 탓이다.

프랑스 명품 회사 에르메스가 만든 말 안장. 주문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고가 제품은 가격이 수억원이다. 중앙포토

프랑스 명품 회사 에르메스가 만든 말 안장. 주문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고가 제품은 가격이 수억원이다. 중앙포토

의사인 내가 북한에 뇌물로 바친 에르메스 말 안장 보도를 보고 격분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말라리아다. 대표적인 후진국 병으로 알려진 말라리아 얘기를 왜 갑자기 꺼내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말라리아 발생률 1위다. 군의관 시절 군내 감염병을 전담할 당시 이 사실을 처음 알고 많이 놀랐다.

말라리아는 원래 한반도에 창궐해 있었다. 하지만 역대 우리 정부가 성공적인 방역 정책을 시행한 덕분에 1979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말라리아 완전 퇴치국가로 인정받았다. 북한은 달랐다. 말라리아 창궐을 막지 못했다. 휴전선 부근의 모기떼가 북한 감염자의 피를 빨고 우리나라로 날아와 접경지역의 주민과 군인을 물었다. 한국에 다시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이유다. 경기 북부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말라리아 환자는 1990년대 이후 연 4000명까지 증가했고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기준치 이상의 환자가 발생한 파주·연천·철원·강화 등 북한 접경 지역 주민의 헌혈을 제한했다. 또 군부대 환자 발생을 줄이기 위해 전방 부대 장병들에게는 말라리아 집중 발생 기간인 5~10월 사이 관련 약을 복용시켰다. 비유하자면 예방약으로 몸속을 무장한 우리 군이 휴전선을 따라 '인계철선'을 구축한 다음 북에서 쳐들어오는 말라리아 모기 부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환자 발생을 꾸준히 줄여 2014년에는 4000명에서 뚝 떨어진 400명을 기록했다.

자료: 질병관리청

자료: 질병관리청

그러나 내가 군에 입대한 2016년 무렵 다시 600명으로 증가했다. 한국의 말라리아 환자는 주로 전방 군 부대 장병과 인근 지역 주민 사이에서 발행하는데, 군내 환자가 늘어난 탓이었다. 말라리아는 예방약을 한번 먹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기존 치료약을 매년 5~10월 내내 장기간 복용하는 방식이다 보니 구토·설사·피부발진 등 부작용이 빈발했다. 심지어 성 기능 장애가 생긴다는 잘못된 소문이 돌아 약을 몰래 버리는 장병까지 늘었다. 군대 내 환자 발생이 늘어난 이유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이 군내 감염병 예방 업무 담당자들을 불러 환자 발생을 줄이라고 닦달했다. 나를 포함해 당시 담당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조처를 취했다. 반드시 간부와 병사가 함께 모여 약을 복용하게 하고 약 삼키는 것까지 확인하도록 강제했다. 또 불시에 지도 방문을 나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약 봉투가 보이면 해당 부대 지휘관을 징계하겠다고 협박했다.

부작용에 시달리는 장병들의 빗발치는 민원에 시달려가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약 복용률을 높인 덕분에 환자 발생을 300명까지 줄였지만 여기서 더는 줄지 않았다. OECD 말라리아 발생률 1위라는 오명도 그대로였다. 휴전선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모기를 막을 수 없으니 북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를 퇴치하지 않는 이상 백약이 무효했던 셈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반도는 열대지역보다 모기가 많지 않다. 유충이 서식하는 물웅덩이만 제대로 방역하고 북한과 인접한 지역 주민에게 예방약을 보급하고 환자 치료만 제때 해도 말라리아 정도는 쉽게 퇴치할 수 있다. 북한은 워낙 보건의료 인프라가 열악하지만 여러 국제기구가 진단키트와 치료제, 방충망 등을 지원해 2001년 30만명에 이르렀던 환자 수를 2017년 1800명까지 줄인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북한은 잇따른 군사 도발로 유엔 안보리의 제재가 강화되자 보건의료물품처럼 제재 대상이 아닌 인도적 지원까지도 거절했다. 게다가 지난 2020년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창궐하자 국경을 완전 봉쇄해 의료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말라리아 완전 퇴치가 요원해진 상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다시 말라리아 환자가 30만 명을 넘고 우리나라에까지 환자가 급증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

말라리아는 환자 치료에 비용이 크게 들지도 않는다. 약값 7000원이면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은 이런 말라리아 환자는 방치한 채 400억원짜리 연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아대고 있다. 한번 쏠 때마다 말라리아 환자 570만 명을 치료할 수 있는 돈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것이다. 굳이 ICBM 얘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에르메스 말 안장 하나 살 값이면 북한의 모든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하고도 남는다. 제대로 남북 경협을 하려는 사업가라면 에르메스 말 안장이 아니라 말라리아 치료제를 선물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니 김정은을 계몽 군주라 칭하는 추종하는 세력이 아니고서야 뒷돈 주고 얻어낸 거짓 평화를 지지하는 국민은 없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는 지난 10월 유니세프(UNICEF)와 WHO의 코로나 백신 및 마스크 지원과 말라리아 퇴치 사업, 일반 예방접종 사업 등의 인도적 대북 지원에 제재 면제를 승인했다. 북한만 동의한다면 뒷돈 없이도 충분히 말라리아 퇴치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윤석열 정권에서는 말라리아 남북 공동방역 사업처럼 호혜적인 사업의 투명한 진행을 통해 당장 눈앞에 놓인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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