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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녀 4명 살해’ 옥살이하던 엄마…DNA서 발견된 대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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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많은 분이 이 이름을 기억하실 겁니다. 전 국민이 혐오하는 연쇄살인범이죠.

[정글]

호주에도 이런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이라 불리는 캐슬린 폴빅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기 4명을 살해한 혐의로 2003년 유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캐슬린 폴빅은 호주 국민이 가장 증오하는 여성이다. 다른 동료 수감자들도 혐오하는 인물로, 교정기관 측은 폴빅이 공격받을까 봐 독방에 가뒀다. 하루 22시간을 홀로 보낸다고 한다. 사진은 폴빅과 아기들. 왼쪽이 사라, 오른쪽은 로라. 사진 justiceforkathleenfolbigg.com

캐슬린 폴빅은 호주 국민이 가장 증오하는 여성이다. 다른 동료 수감자들도 혐오하는 인물로, 교정기관 측은 폴빅이 공격받을까 봐 독방에 가뒀다. 하루 22시간을 홀로 보낸다고 한다. 사진은 폴빅과 아기들. 왼쪽이 사라, 오른쪽은 로라. 사진 justiceforkathleenfolbigg.com

하지만 그녀는 논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폴빅이 결코 죄를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결백을 주장합니다. 살인을 증명할 명백한 물증도 없었죠.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최근 폴빅과 폴빅이 낳은 네 아기의 DNA에서 공통적인 돌연변이를 발견했습니다. 이 돌연변이를 보유한 사람은 목숨을 잃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사건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죠.

2019년 재조사에 참석한 캐슬린 폴빅. 그녀는 심문 과정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사진 호주 AP=연합뉴스

2019년 재조사에 참석한 캐슬린 폴빅. 그녀는 심문 과정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사진 호주 AP=연합뉴스

폴빅은 파렴치한 살인마일까요, 아니면 DNA 돌연변이로 아기 넷을 잃은 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엄마일까요.

네 아이의 급작스러운 죽음

폴빅의 첫째 아들은 케일럽은 1989년 2월 1일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22살에 낳은 아이입니다. 케일럽은 생후 19일에 아기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사인은 영아 돌연사 증후군이었습니다.

이후 태어난 아이 3명도 연달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1991년생인 아들 패트릭은 생후 8개월, 1993년생 딸 사라는 생후 10개월에 숨졌습니다. 패트릭은 간질 발작, 사라는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사망했습니다.

왼쪽부터 폴빅의 아기인 케일럽, 패트릭, 사라, 로라. 사진 justiceforkathleenfolbigg.com

왼쪽부터 폴빅의 아기인 케일럽, 패트릭, 사라, 로라. 사진 justiceforkathleenfolbigg.com

마지막 딸 아이 로라는 1999년 태어났고, 아이들 중에는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생후 18개월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로라의 사인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로라를 부검한 법의학자는 로라의 심장에서 바이러스 감염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사망의 직접적 원인이 될 만큼 심각하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소견서에 로라의 사인을 ‘불명(undetermined)’이라고 기재했습니다.

폴빅이 이전에 낳은 아이 3명이 잇따라 죽은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경찰에 로라의 죽음이 의문스럽다고 알립니다. 병사나 자연사가 아닌 살인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폴빅을 불러 조사하기도 했죠. 하지만 폴빅은 극구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뚜렷한 물증도 찾기 힘들어 수사는 겉만 맴돌았습니다.

폴빅의 일기장 그리고 메도우의 법칙

그러던 중 로라 방을 정리하던 남편 크레이그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노트를 발견합니다. 아내 일기장이었습니다. 폴빅의 어두운 내면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크레이그는 경찰에 이를 넘기며 “아내에 대해 전혀 모르던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폴빅은 수사 내내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재판에 넘겨집니다. 재판은 2003년 7주간 열리며 호주 국민의 엄청난 관심을 불렀습니다. 순진하게 생긴 30대 여성이 잔혹한 살인마일 수 있다는 사실에 언론도 국민도 크게 놀랐습니다.

수사가 시작됐을 때, 아무리 봐도 폴빅은 연쇄살인범 같지 않았다. 재판 시작 때만 해도 결백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에 호주 국민은 혼란에 빠졌다. 사진 AP=연합뉴스

수사가 시작됐을 때, 아무리 봐도 폴빅은 연쇄살인범 같지 않았다. 재판 시작 때만 해도 결백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에 호주 국민은 혼란에 빠졌다. 사진 AP=연합뉴스

물증이 없었음에도 재판은 폴빅에게 불리하게 흘렀습니다. 증인으로 소환된 전문의들은 “로라는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사망하기엔 나이가 많다”고 했습니다. 보통 이 증후군은 첫 돌이 지나지 않은 아기에게 나타나는데 로라는 18개월에 사망했다는 것이죠.

일기에 적힌 글들이 의심을 키웠습니다. 음침하고 우울한 글에는 아이에 대한 미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끔찍한 일을 저지를 뻔했다. 아기를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나는 세상 최악의 엄마인 것 같다. 로라가 날 떠날까 봐 두렵다. 사라처럼.”

“제발 좀 사라가 그냥 닥쳐줬으면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는 그렇게 해주었다.”

“때때로 아기를 못 견디겠다. 내가 잔인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로라는 약간의 도움을 받아 떠났다.”

아이 죽음 전후해 쓰인 일기 글이 공개되자 여론은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여기엔 당시 영국과 호주 사람들을 사로잡은 유명한 이론의 영향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메도우의 법칙’입니다.

이 이론은 유명한 영국 소아과의사 로이 메도우가 만들었습니다. 메도우는 아동학대 전문가로 저명인사였습니다. 대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스타 의료인’이었죠.

메도우는 “아기 하나의 죽음은 비극이고, 둘의 죽음은 의심스럽다. 하지만 셋의 죽음은 살인이다.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면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대중뿐 아니라 전문 의료인 뇌리에도 깊이 박힌 ‘시대의 격언’으로 여겨졌습니다.

검사는 배심원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자녀 4명이 갑작스럽게 죽는 경우는 없다. 벼락이 한 사람을 4번이나 때리지는 않는다.”

물증이 없고 자백도 없었지만,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폴빅의 유죄를 평결했습니다. 재판부는 폴빅에게 가석방없는 징역 40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항소심에서 징역 30년형으로 감형됩니다.)

폴빅 DNA에서 발견된 희귀 돌연변이

사건은 폴빅이 끔찍한 연쇄살인마인 것으로 결론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폴빅의 유죄 선고에 배경이 됐던 이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셋의 죽음은 살인이라던 메도우는 2005년 영국에서 열린 재판에서 잘못된 증언을 해 일시적으로 의료 자격을 박탈당하죠. 영아 돌연사 증후군이 매우 드물다는 식으로 통계를 조작했다는 겁니다.

아이 셋을 죽인 혐의로 기소된 영국 여성 앤젤라 캐닝스가 추가 수사 끝에 무죄 판결을 받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캐닝스가 처음에 유죄를 받은 데에는 메도우의 법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아이를 잃었지만 살인 혐의로 기소된 엄마들이 무죄 판결을 받는 일이 영국에서 줄줄이 일어났습니다.

아이 3명을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잃은 앤젤라 캐닝스. 그녀 역시 메도우 법칙의 희생양이었다. 출처 존 헤밍

아이 3명을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잃은 앤젤라 캐닝스. 그녀 역시 메도우 법칙의 희생양이었다. 출처 존 헤밍

한 가족에서 여러 아이가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사망한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사실도 책과 뉴스 보도로 알려졌습니다. 이제 메도우의 법칙은 사기에 가까운 망언임이 입증됐습니다. 이에 고무된 폴빅의 변호사들은 여러 의료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증거를 모았습니다.

이후 장장 15년이 흘렀습니다. 새로운 반대 증거가 쌓이자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는 폴빅의 재수사 청원을 받아들였습니다. 2018년, 15년 만에 재수사가 이뤄졌습니다.

변호사들은 폴빅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과학의 힘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외력에 의해 죽지 않았다면, 선천적 질병이나 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 이유가 아이의 DNA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했죠.

2003년 재판 당시에는 완벽한 DNA 염기서열 분석이 불가능했지만, 2018년엔 30억개의 염기서열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 나와 있었습니다. 변호사들은 호주국립대의 유전학자 카롤라 비누에사를 찾아갑니다.

비누에사는 교도소에 갇힌 폴빅에게서 침과 구강세포를 채취했습니다. 사망한 아이 4명에게서도 DNA를 채취했습니다.

분석 결과 폴빅과 두 딸 사라와 로라의 DNA에서 불길한 돌연변이 ‘CALM2 G114R’을 발견했습니다. 두 아들 DNA에서도 희귀 돌연변이 ‘BSN L 1898M’이 나타났죠.

폴빅과 두 딸의 몸에서 발견된 칼모듈린 돌연변이.

폴빅과 두 딸의 몸에서 발견된 칼모듈린 돌연변이.

폴빅과 두 딸 DNA엔 세포 내 칼슘 농도를 조절하는 단백질인 칼모듈린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었습니다. 이 돌연변이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칼모듈린은 칼슘 이온을 전달하는 단백질입니다. 칼슘 이온은 세포 활동과 신경 연결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죠. 칼모듈린이 잘못되면 부정맥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재수사의 쟁점은 과연 폴빅과 두 아이의 칼모듈린 돌연변이가 돌연사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과학자는 두 소녀의 죽음은 이 돌연변이로 인한 전형적 사망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습니다.

칼모듈린 이상으로 인한 돌연사는 자다가 발생하기보다 활동할 때 일어나는 게 일반적이라는 거였습니다. 사망하는 나이도 대부분 10~18세라고 했습니다. 폴빅이 건강하다는 사실 역시 돌연사 가능성이 희박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누에사는 이에 대해 “칼모듈린 이상으로 인한 사망자의 25%는 자다가 사망했고 20%는 2세 이전에 사망했으며 부모가 건강해도 사망한 사례가 다수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두 남자아이에게서 발견된 돌연변이 역시 생명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확실히 밝히지는 못했죠.

감옥에 갇힐 당시 36세였던 캐슬릭 폴빅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55세의 중년 여성이 됐다. 수감 기간만 19년. 재수사를 통해 그녀의 결백이 밝혀질까. 사진은 이번 2차 재조사에 참석한 폴빅. 사진 호주 AP=연합뉴스

감옥에 갇힐 당시 36세였던 캐슬릭 폴빅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55세의 중년 여성이 됐다. 수감 기간만 19년. 재수사를 통해 그녀의 결백이 밝혀질까. 사진은 이번 2차 재조사에 참석한 폴빅. 사진 호주 AP=연합뉴스

과학자 집단이 둘로 나뉘어 서로 다른 주장을 편 가운데 재조사 위원장인 전직 판사 레지널드 블랜치는 돌연사 가능성이 적다는 쪽에 기울었습니다. 그는 2019년 7월 “정황 증거와 과학적 자료를 두루 살펴도 폴빅의 유죄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재조사, 과연 이번엔 판결 뒤집힐까

재조사가 폴빅의 유죄로 결정됐지만 변호사와 과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 15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폴빅의 사면 청원에 서명했습니다. 이 중엔 노벨상 수상자 2명도 포함돼 있죠.

비누에사 박사도 세계 연구진과 공동으로 연구해 지난해 11월 폴빅의 케이스를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칼모듈린 돌연변이가 어떻게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밝혔습니다.

칼슘의 이동 메커니즘이 망가지면 근육의 수축과 이완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심장 근육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부정맥 가능성이 현저히 커진다는 거죠.

로라의 심장근육에서 발견된 바이러스 감염의 흔적. 일반인에게 바이러스 감염은 큰 작용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모듈린 돌연변이가 있었던 로라에게는 바이러스 감염이 치명적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사진 카롤라 비누에사 논문

로라의 심장근육에서 발견된 바이러스 감염의 흔적. 일반인에게 바이러스 감염은 큰 작용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모듈린 돌연변이가 있었던 로라에게는 바이러스 감염이 치명적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사진 카롤라 비누에사 논문

특히 사라는 죽기 전 호흡기 질환을 앓았고 로라는 심장에 감염의 흔적도 있는 만큼, 이 돌연변이로 사망할 위험이 큰 조건이었다고 했습니다. 남자아이들의 돌연변이도 쥐 실험에서 간질 발작의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드러났죠.

논문이 발표되면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는 지난 5월 2차 재조사를 명령했습니다. 지난 14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논란 많았던 폴빅의 일기에 대한 심리학자의 재분석 결과도 발표될 예정입니다.

폴빅에 대한 재조사는 첨단과학이 재판 양상을 바꿀 수 있을지를 가리는 시험대가 될 겁니다. 전 세계 유전과학자들도 주목하고 있죠.

첨단 유전과학은 폴빅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모두 살해당한 것이 아닌 병으로 자연사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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