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진의 K발레, 고전 넘어 모던 걸작도 ‘월드 클래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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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호 22면

국립발레단 60주년 기념 신작 ‘트리플 빌’ 

루마니아 안무가 에드워드 클러그가 쇼팽 음악에 맞춘 작품 ‘Ssss...’. [사진 국립발레단]

루마니아 안무가 에드워드 클러그가 쇼팽 음악에 맞춘 작품 ‘Ssss...’. [사진 국립발레단]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현대발레 작품 세 편을 묶은 ‘트리플 빌’이 올랐다. 올해로 창단 60주년을 맞은 국립발레단이 10편의 공연으로 환갑 기념 일년 프로그램을 짰는데, 그 중 해외안무가들로만 구성된 가장 현대적인 작품들이었다.

루마니아 태생 안무가 에드워드 클러그가 첫 문을 열었다. ‘쉿,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봐. 그리고 고요함 속에서 감정의 리듬을 느껴봐.’ 조용히 시킬 때 내는 소리 ‘쉿’에서 따온 제목 ‘스(Ssss)...’를 발음해보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모아졌다. 무대 위, 피아노는 한 대인데 피아노 의자는 170개가 놓여 있다. 무대 뒤편을 가득 메우며 마치 블록처럼 빽빽이 들어찬 의자들 사이에 세 쌍의 무용수가 있다. 피아니스트는 관객을 등지고 앉아 연주를 시작한다. 이어 흘러나오는 쇼팽의 음악은 발레 동작과 찰떡궁합처럼 맞아떨어졌다.

올해 라인업 중 창작 작품은 하나뿐

독일 안무가 우베 숄츠가 베토벤 음악을 시각화한 ‘교향곡 7번’. [사진 국립발레단]

독일 안무가 우베 숄츠가 베토벤 음악을 시각화한 ‘교향곡 7번’. [사진 국립발레단]

안무가 클러그는 피아니스트를 등 돌려 앉게 한 이유를 “음악을 반주가 아닌 독립적인 장르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이미 다른 음악에 맞춰 짜놓은 안무에 우연히 쇼팽의 ‘야상곡’을 덧입혀봤고, 그 결과 동작 뿐 아니라 연출적인 면까지 조화롭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음악을 바꿔 완성했다고 했다. 통상 안무가들은 먼저 음악을 수없이 듣고 거기에서 안무 모티브를 찾는 게 일반적인 것과 비교하면 창작 일화가 독특하다.

신고전주의 발레의 아버지 조지 발란신은 ‘음악을 보고, 춤을 들어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한 마디에 자신의 안무 철학을 담아냈듯이 발레는 음악과 깊이 있게 연결돼 있어야 하고 최대한 음악과 어우러질 수 있는 동작으로 탄생됐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클러그의 안무방식은 발란신의 철학에서 크게 벗어나있다. ‘스...’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음악과 발레의 ‘찰떡궁합’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쇼팽의 ‘야상곡’은 부드러운 리듬과 감성적인 선율로 많은 춤의 배경음악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스...’에서 만큼은 배경음악이 아닌 독립된 연주로 무대를 장악했다. 음악과 춤은 ‘따로 또 같이’를 반복하며 각자의 길을 가다, 어느 찰나에서는 최상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발레리나가 한 다리를 높이 든 채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남성 파트너가 한 팔로 상대의 체중을 이겨내는 포즈가 가장 압권이었다. 마치 음악과 춤이 감정의 리듬을 서로에게 들려주듯이. 2012년 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여전히 세련된 감각의 ‘스...’는 컨템퍼러리 발레가 신고전주의 발레와 어떤 경계를 이루며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뒤이어 무대에 오른 ‘아티팩트 II’는 ‘스...’에서의 감동을 배가시켰다. 천재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의 1984년 작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에서 초연한 이래 40년 가까이 세계 무대에 오르고 있는데, 국립발레단에 들어온 첫 포사이드 작품이 됐다.

바흐의 음악이 배경인데, 클러그가 시도한 음악과의 ‘불일치 속의 조화’를 포사이드는 좀 더 정교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연출은 매 시퀀스가 바뀔 때마다 무대 막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무용수가 춤추고 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무대 막은 내려오고 관객의 당황함도 무시한 채 이를 반복했다. 발레 기술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면서 무용수의 몸을 최대한 확장하고, 불균형에서 미학적 요소를 찾는 포사이드의 안무는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컨템퍼러리 발레의 대표적 양식임을 재확인시켰다.

우베 숄츠 안무의 ‘교향곡 7번’은 조지 발란신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악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발레의 전형적인 특징을 표현했고, 베토벤의 웅장한 음악이 이끄는 데로 원색의 무대를 펼치는 다채로움이 인상적이었다. 2014년 처음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로 도입된 만큼 군무진의 기량 또한 세 편 중 가장 안정적인 무대였다.

국립발레단은 ‘호두까기인형(12월 17일-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끝으로 대장정의 60주년 기념공연을 마무리한다. 올 한 해 동안 올린 총 열 편의 레퍼토리를 살펴보는 것으로 한국발레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었다. 1962년 대한민국 최초의 직업 발레단으로 시작해 현재 80여 명의 단원을 보유한 대형 발레단으로 성장한 축하 무대엔 어떤 명작들이 올랐는가.

내년 독일·스위스서 해외공연 준비

미국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가 바흐 음악을 바탕으로 짠 ‘아티팩트 II’. [사진 국립발레단]

미국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가 바흐 음악을 바탕으로 짠 ‘아티팩트 II’. [사진 국립발레단]

과거에 비하면 발레 애호가가 대폭 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국내에선 발레 입문에 수월한 고전발레 작품이 인기 레퍼토리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인형’은 예외 없이 대성황을 이룬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변함없을 것 같다. 국립발레단원 송정빈이 재안무한 ‘해적’도 고전발레 리스트에 올랐다. 낭만발레 작품 중에서는 ‘지젤’을 선택했고, 프레데릭 애쉬튼 안무의 ‘고집쟁이 딸’이 전막 발레로 새롭게 영입됐다. 그 외에는 신고전주의 발레와 모던 발레 작품으로 조지 발란신의 ‘주얼스’와 ‘트리플 빌(스..., 아티팩트 II, 교향곡 7번)’을 구성했다. 단원 강효형이 안무한 ‘허난설헌-수월경화’가 유일한 창작품으로 들어있다. 송정빈의 ‘해적’은 원작을 재안무한 것이니 한국인이 오롯이 안무한 작품으로는 ‘허난설헌-수월경화’가 유일하다.

올해 프로그램만 봐도 국립발레단은 조직과 예산 등 행정적인 면모는 물론, 예술적인 역량이 대폭 강화됐음을 알 수 있다. 해외 유수발레단에 대거 포진된 한국무용수들이 한국 발레의 위상을 말해 주지만, 이런 수준높은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국립발레단원들의 기량도 세계적이다. 특히 체격과 표현력을 겸비한 남성 무용수들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무용수들 기량 발전에 비하면 앞서 나열한 레퍼토리 구성에는 부족한 구석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60주년을 기념할 만한 신작이 없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한해 프로그램을 짜는데 꼭 신작이 있어야한다는 원칙은 없다. 단체의 특성과 기량에 걸맞고 관객이 사랑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60주년을 맞아 세계적인 관심과 역사적 방점을 찍으려 했다면 신작 전막발레 제작을 준비했어야 했다.

2014년 부임한 강수진 단장은 세 번의 연임을 거쳐 올해로 임기 9년째다. 발레단 60년 역사 중에서 30년 최장수 단장을 지낸 임성남에 이어 최태지 단장이 12년, 그 뒤를 이은 나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강수진이 누군가. 한국인으로는 선구적으로 세계 메이저 발레단에서 활약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축구계의 차범근에 비교될 만큼 전설적인 그가 한국에서 발레단을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 설렜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수진은 이러한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단원들과 직접 몸을 부대끼며 열정을 쏟았고, 단장이자 예술감독으로서 레퍼토리 구성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했다. 단장에게 쏟아진 발레 애호가들의 사랑만큼이나 발레단의 명성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취임 이후 시도해 온 새로운 레퍼토리들이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국한되었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이번 ‘트리플 빌’만 보더라도 ‘스...’와 ‘교향곡 7번’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초연했던 작품이고 ‘아티팩트 II’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공연된 적 있다. 결과적으로 모던 발레 작품이 상대적으로 희귀한 국립발레단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반가운 영입이었을 수 있다. 세 작품을 한 무대에 올리는데 있어 조화로웠고, 쇼팽·바흐·베토벤의 음악과 발레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에 재연도 기대해 볼 만하다.

그러나 2014년 부임이후 내놓은 전막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안나 카레리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도 모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버전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쏟아 붓기에 적절한 선택이었을 테지만, 9년 동안 좀 더 다양한 계열의 발레를 시도하는 모험은 어려웠던 모양이다.

2023년 국립발레단은 세계로의 큰 도약을 계획하고 있다. 독일 수교 140주년과 스위스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해외공연을 준비 중인데, 독일 비스바덴 헤센 주립극장에서의 공연은 높은 개런티를 보장받은 흔치 않은 해외공연이 될 것이라고 한다. 소개할 레퍼토리는 송정빈 재안무의 ‘해적’이다. 비록 창작발레는 아니지만 원작을 70%이상 개작했으니 한국의 안무가와 무용수들의 실력을 평가받기에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발레의 위상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해가 되길 기대한다.

장인주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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