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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가 ‘남의 이야기’ 라고 침묵? ‘곁’이 되는 목소리 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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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호 26면

이현석의 ‘소설의 곁’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퐁투아즈 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 요양원에 들어간 지 두 해째였다.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왔다. ‘모친께서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 10시쯤이었다.”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열린책들, 2012)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기장을 살펴보니 진 리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실비아 플라스처럼 자기 삶을 가감 없이 다루는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친구의 권유로 2016년 여름에 이 책을 읽었다. 어느 일요일의 오전이었고, 소파에 누워 소설을 읽던 나는 깜박 잠에 들었다.

얕은 잠이 자주 그러하듯 나는 꿈을 꾸었는데 꿈은 분명 나의 어머니와 관련된 꿈이었으나, 꿈이 종종 그러하듯 꿈속의 어머니는 내 모친과 전혀 달랐다. 내 어머니는 꿈속의 어머니처럼 치매증상을 보인 적도 없었고, 퐁투아즈 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 요양원에 들어갔을 리 만무했으며, 벽안의 서양인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꿈속의 ‘한 여자’를 내 어머니라 여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잠에서 깼다.

이상했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혈연관계를 뜻하는 단어에 자동으로 눈물을 흘릴만한 토속성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이 눈물의 정체가 궁금해져 비몽사몽간에 일기장을 펼쳤다. 떠오르는 말들을 두서없이 써내려간 그날의 일기를 요약하자면 ‘이야기는 힘이 세고, 그 힘은 다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취향이 꽤나 다른 친구의 권유에 심상히 집어 들었던 자전적인 소설은 꿈결에 나에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무의식 속에서 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역동은 인간이 서사적 동물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감정은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고 고조되며,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은 다시 이야기하기를 욕망한다.

바야흐로 나의 이야기가 범람하는 시대다. 주변에서 자기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찾는 것은 이제 낯설지 않다. 개인 매체는 자기 이야기를 전시할 수 있는 무대를 무한대로 제공해주었다. 당장 페이스북이든, 블로그든 장문의 글을 남길 수 있는 아무 플랫폼이나 들어가 보라. 엄지를 서너 번 움직이기 무섭게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둔 글이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사적인 플랫폼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이야기는 출판계에서도 이미 주류가 된지 오래다. 출판계가 단군 이래 최대불황을 매년 갱신해나가는 와중에도 인터넷서점 예스24의 집계 상 에세이 출간 종수는 지난 4년 간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 마련된 추모공간에 꽃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 마련된 추모공간에 꽃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나의 이야기 많아질수록 ‘나의 이야기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해진다. 우리는 진공 속에서 살지 않으며, 누구나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 환경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타인이므로. 당연히 나도 ‘쓰는 사람’인 이상 이러한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는데, 여기에는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와 없는 이야기를 고심하게 만드는 창작 환경도 한몫을 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최근 2~3년 사이 한국 문단에는 오토픽션과 자전 소설에 의한 사생활 침해 논란이 몇 차례 있었다. 소설뿐만 아니라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업인이 자신의 일을 다룬 글에서 환자나 의뢰인의 개인정보를 편취한 사례도 지속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물론 나는 소설가가 소설에서 제3자의 사생활을 노출시킨 것과 전문직업인의 내담자 정보 편취는 층위가 매우 다른 문제라고(즉, 후자의 경우가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나, 두 가지 일을 같이 하고 있는 입장이기에 때로는 두 문제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그게 정말 그렇게 다른 일인가’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사안을 단순하게 뭉뚱그려서 ‘아니,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그냥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안 쓰면 안 되나’라는 우렁찬 죽비소리가 목젖을 맴돌기도 한다.

하지만 선명한 문장은 맥락을 지우기 마련이다.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쓰지 마라’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는 금언이 될지 모르나 모든 상황에 통용될 만한 만능열쇠가 되지는 못한다. 경우에 따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정의감을 고취시키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는 공허한 문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아가 어떤 사안에 대해 ‘남의 이야기’라고 지레 판단하여 침묵하는 태도가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져야할 책무를 도외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지난 10월 29일의 참사 이후 더욱 공고해진 생각이다.

이태원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인근에 거주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날 밤 구급차와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깼다. 곧이어 재난문자가 왔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아직은 그날 밤의 사이렌 소리를, 그 소리를 들었을 때의 감정을,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았을 때 느꼈던 공포와 이후로 서서히 응어리지는 마음을 어떻게 언어화할지 알지 못한다. 다만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침묵으로 도망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전의 참사들로부터 배운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재난 앞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은 유가족으로, 생존자로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토막 난 말들이 공론장을 점거하려는 지금, 사소한 목소리일지라도 ‘곁’이 되는 목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현석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 장편소설 『덕다이브』 등을 썼다. 2020년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본업은 의사로 사업장 보건관리 및 업무관련성 질환을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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