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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센 처벌에도 중대재해 안 줄었는데…英 마법의 보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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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로템이 21일부터 다음 달 20일까지 동절기 철도차량 운행 안전 확보를 위한 사전 예방점검 서비스를 한다. 현대로템 관계자가 차량기지에서 전동차를 점검하는 모습. [현대로템 제공] 연합뉴스

현대로템이 21일부터 다음 달 20일까지 동절기 철도차량 운행 안전 확보를 위한 사전 예방점검 서비스를 한다. 현대로템 관계자가 차량기지에서 전동차를 점검하는 모습. [현대로템 제공] 연합뉴스

한국의 사고사망만인율(1만명당 사망자 수)은 0.43‱(퍼밀리아드)이다. 10만명당 4.3명꼴로 숨진다는 뜻이다. 영국의 1970년대, 독일과 일본의 90년대 수준이다. 영국과 독일은 그 이후 확 떨어져 0.0‱대에 이르렀다.

중대재해 왜 안 줄어드나…패러다임 바꿔야<하>

경제 수준이 다르니 단순 비교가 무리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기준으로 외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산업안전이 어느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2017년 3만 달러에 진입했다. 당시 사고사망만인율은 0.52‱였다. 독일(1995년)은 0.42‱, 일본(92년)은 0.46‱, 미국(97년)은 0.47‱이었다. 70년대부터 산업안전정책의 패러다임을 확 바꿔 적용해온 영국(2002년)만 0.07‱이었다.

선진국도 1인당 GDP 3만 달러일 때 대부분 사고사망만인율이 0.45‱ 안팎을 기록하며 산업안전이 그다지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독일 등은 0.0‱대로 줄일 수 있었을까.

산업안전 선진국은 노사가 스스로 안전규칙을 만들어 이행하는 '자기 규율'을 독려하고, 이를 법적으로 동등한 효력으로 인정한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산업안전 선진국은 노사가 스스로 안전규칙을 만들어 이행하는 '자기 규율'을 독려하고, 이를 법적으로 동등한 효력으로 인정한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영국의 정책은 산업안전의 모범으로 꼽힌다. 1960년대까지 영국도 산업현장의 사고와 인명피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내 건 카드가 감독과 규제, 처벌 강화였다. 감옥이 무서워서라도 산업안전에 매진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법을 강화해도 산재 사고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나기도 했다. 마치 중대재해처벌법이 발효(1월 27일)된 뒤 중대재해가 더 늘어나는 한국처럼 말이다.

영국 정부는 결국 패러다임 점검과 개선에 착수했다. 그에 따라 나온 것이 모든 선진국의 산업안전 기준서로 평가받는 로벤스(Robens) 보고서다. 1970년 6월 로벤스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왕립위원회가 발족했다. 산재 예방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탐구하는 위원회였다. 2년 여의 연구 끝에 72년 로벤스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의 요지는 "촘촘한 법과 규제만으로는 중대재해 예방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자기 규제, 자기 통제, 자기 모니터링에 기반을 둔 '자기 규율 예방체계'로 전환해야 한다"였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74년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됐다. 사업장의 자기 규율, 즉 자율적으로 벌이는 산업안전 활동을 법적으로 동등한 효력으로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영국의 사고사망만인율은 하강 곡선을 그리며 2001년 0.08‱을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0.0‱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이 산업안전의 전환점을 맞은 계기 또한 자율 산재예방활동을 촉진하고, 지원하면서다. 독일은 2001년 사고사망만인율이 0.3‱에 달했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이던 때보다는 낮아졌지만 산업안전 확보 문제는 골칫거리였다.

독일은 이를 해결하려 노사자치입법을 독려했다. 노조와 업종별 협회가 해당 업종이나 지역 또는 사업장에 맞는 '재해예방규칙'을 제정해 시행토록 한 것이다. 물론 이 규칙의 이행에 대해 연방법이나 주법과 동일한 대접을 해줬다. 재해보험조합(DGUV)을 통해 안전보건 기술 지원도 한다. 자율 예방 규칙을 제정하고 준수하는 문화를 통해 안전문화가 내재화하면서 사고사망만인율을 0.0‱대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일본의 산업안전법은 사업주 책임의 자율안전관리 촉진 체계에 방점을 둔다. 위험 예지 훈련(TBM 방식) 등을 사회적 운동으로 끌어올렸다. 이 덕분에 5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에도 노사가 참여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설치율이 70~80% 수준에 이르렀다.

강태선 서울사이버대 안전관리학과 교수는 "자율규제는 사업주의 능동적 이행을 촉진하는 고품질의 규제"라며 "중대재해 관련 규칙을 늘리고 이에 대한 해설서를 보급해 자율 체제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선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령에 정한 규정 자체보다 (기업 자율의) 위험성 평가를 내실화하고, 정부의 감독도 법 위반 사항 발견보다 위험성 평가 이행을 위주로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런 자율 안전 체계, 즉 사업장의 노사가 스스로 규율하고, 이행하는 '자기 규율 방식'이 활성화해야 처벌·감독의 단계를 넘어서 자기규율 예방체제로 전환될 수 있고, 이게 안전문화 내재화로 이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산업안전 선진국이 걷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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