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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1000명을 한 줄로 세우는 사회에는 앞날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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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8년 전이다. 월간 샘터사 사무실에 네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인이 된 전 국회의장 김재순씨가 “자식 자랑은 점잖지 못한 일인 줄 아는데, 며칠 전 내 손주가 미국 MIT대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나와 인척 관계이기도 해서 “그런 자랑은 많이 해도 괜찮아. 누구든지 아버지 닮았다고 하지 할아버지 닮았다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나는 ‘아들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한창일 때 딸 넷, 아들 둘을 키웠다. 죄송스런 생각이 들어 딸 셋은 미국에서 살기로 했다. 나 자신이 교육자이기 때문에 항상 미국에 있는 손주들과 한국에서 자라는 손주들을 비교해 보곤 한다. 미국 외손주 다섯은 자유로이 잘 자라 제각기 길을 택했다. 넷은 의사가 되고 외손녀는 MIT를 나와 애플의 중견사원으로 있다. 지난 9월에는 증손주가 하버드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모두가 즐거운 학창 생활을 보냈고 자기 길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행복과 보람을 느끼며 산다는 점이다.

수능식 시험제도 이대로 둘 건가
아이들을 점수의 노예로 만들어

공부는 스스로 즐겁게 택하는 것
학교보다 학원을 찾으면 되겠나

사고력·창조력이 평생을 이끌어
미래 준비하는 새 정부의 교육은?

미국 손주들 vs 한국 손주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그런데 한국의 손주들은 교육정책의 후진성으로 자유로운 학창 생활을 즐길 수 없어 한 번뿐인 인생의 자율성과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많이 개선됐다 해도 초등교육은 중등교육의 예비기간이 되고, 고등학교 교육은 대입을 위한 과도기가 되었다. 성적 평가가 인간 평가의 기준이 되어 점수에 매달려 자율적인 학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정상적인 학교교육보다 학원이나 입시준비의 노예가 되었다.

성적을 위한 공부도 그렇다. 초등학교 때는 즐겁게 기초교육을 받으면 된다. 중학교를 마칠 때쯤부터는 자율적인 학습 과정을 찾아 스스로 즐겁게 공부하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 고등학교도 대입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인성교육은 배제되고 성적이 학교생활의 전부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시험공부의 노예로 만드는 수능시험이 걱정이다. 그 비교육적인 부담을 벗어나기 위해 일찍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

내 손주들도 그랬다. 큰손녀가 집 가까이 남녀공학 중학을 마치고 이화여대 부속 금란여고에 입학했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수능시험을 위해 인간교육은 멀리하게 되었다. 학교성적이 우수한 편도 못되니까 원하는 대학에 갈 자신도 부족했다. 학교 성적이 A보다 B 정도였다. 그것이 잘못은 아닌데 자존심을 빼앗기는 모습을 부모로서는 보기 힘들었다. 1년 손해를 보더라도 미국으로 보내 고등학교 과정을 밟게 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선택대로 즐겁게 공부했다. 콜로라도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마음 편히 자기 길로 정진할 수 있었다. 지도교수의 추천에 따라 전공분야 대학원을 선택했고 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논문과 더불어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지난 9월 학기부터 일리노이주립대학 교수로 진출했다.

내가 객관적인 평가를 해본다. 그 애가 고등학교 과정을 수능시험 준비로 다 보냈다고 해서 한국에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지 모르겠다. 수능시험 굴레를 벗어나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 것만도 감사한데, 스스로 전공분야를 선택한 후에는 우수한 성적과 논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서울 손주 중에도 고등학교 과정부터 미국으로 가 대학을 끝내고 귀국한 애들이 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넓은 의미의 인문학 과정과 영어는 충분히 수료한 셈이다. 귀국해서는 원하는 분야에서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직장에서도 국제무대로 진출할 길이 열린다. 나는 수능시험의 제한된 수업과 교육의 굴레에서 해방해주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후배 교수 중에는 자녀교육 때문에 부인은 귀국하지 못하고, 한국에 혼자 머물면서 교수생활을 하는 가정이 많다. 내 아들딸들은 대학원부터 외국 유학 가는 것을 권고해 왔다. 그때는 수능시험도 없었고, 고등학교부터 미국에서 수학한 학생은 귀국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적어도 대학교육까지는 국내 교육으로 충분한 제도와 과정을 수립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교육은 제도와 규범을 먼저 만들어 놓고 학생들을 그 규범에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을 위해 제도와 규범을 지속해서 개선해 가야 한다. 수능시험의 폐단과 모순이 드러난 지 이미 오래다. 수능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대학에 와서는 학과 성적이 뒤지는 경우가 많다. 한때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려는 학생이 두 명밖에 없어 교수들이 국립대학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했다.

젊음의 열정을 병들게 하지 말라

교육은 계속된 선택이다. 개척과 창의력이 없는 대학은 학문의 길을 개척하지 못한다. 기억력에 의존하는 성적은 고등학교로 끝나지만, 사고력과 창조력은 대학 이후의 평생을 좌우한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필요할지 몰라도, 학문을 위한 창의적 연구는 시험의 한계를 넘어야 가능하다. 시험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폐습이 국가고사, 심지어는 취직시험에까지 미치고 있다. 젊은 정열과 창조력을 병들게 해서는 안 된다.

1000명을 한 줄로 세우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1000명을 100줄에 서게 하면 10명마다 다양한 진로로 성장할 수 있다. 교육을 이념정치의 수단으로 삼는 러시아·중국·북한식 교육을 꿈꾸는 교육자가 있다면 자유 민주국가를 병들게 하는 범죄행위가 된다. 새로운 정부가 미래교육을 위해 창조적인 방향과 정책을 모색해 주기 바란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