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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는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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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이상하다. 자꾸만 올리라고 한다. 임금 얘기다. 재밌는 건, 월급쟁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거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 입에서 자꾸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웃 나라 일본 얘기다. 우선 지난 10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내년 춘투(春闘·춘계 임금 인상 투쟁)에서 임금인상이 필요하다.” 지지율이 낮아 고전 중이라 한 말이 아니다. 빵값·기름값 할 것 없이 죄다 오름세를 보여서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도 총리만큼 임금 인상을 강조하고 있다. 최장수 총재인 그는 내년 3월 임기가 끝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때부터 9년째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금융완화책을 쓰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 14일 이렇게 말했다. “좋은 기업들이 임금 인상에 긍정적으로 임해달라.”

또 있다. 도쿠라 마사카즈(十倉雅和) 게이단렌(経団連) 회장이다.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베이스 업’을 언급했다. 기본급(베이스)을 일률적으로 올리는 것을 회원사들에 전하겠다고 했다.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가장 큰 단체 회장이 앞장서 아예 기본급을 올리자고 나선 건데, 우리로선 낯선 풍경이다.

지난 10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열린 회의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임금 인상 성과에 성장과 분배 선순환 실현이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 일본 총리관저]

지난 10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열린 회의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임금 인상 성과에 성장과 분배 선순환 실현이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 일본 총리관저]

왜일까. 일단 물가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 9월 노동자 1명당 평균 임금(현금 급여총액)은 27만5787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 올랐다. 그런데 물가(3.5%)가 더 올라, 실질임금은 1.3% 후퇴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구동성 임금 인상을 외치는 배경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오랜 일본의 경기침체다. 월급봉투가 두툼해져야 사람들이 돈을 쓴다. 돈을 써야 기업들도, 상공인도 먹고산다. 기업이 돈을 벌어야 투자를 하고, 사람을 고용한다. 경제는 흐름인데, 일본은 이 흐름이 막혀 30년을 잃어버렸다는 판단인 거다.

그런데 일본의 경제 석학,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최근 저서 『어떻게 하면 일본인 임금이 오를까』에서 전혀 다른 지적을 한다. 정치가 지난 20년간 개입해도 일본서 임금이 오르지 않고, 경제가 살지 않는 것은 기업이 ‘버는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마존·애플·구글처럼 ‘버는 힘’이 좋은 기업을 만들 산업구조 변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물가는 치솟고, 내년 전망은 어둡다. “일본의 가장 중요한 장기적 경제 과제는 높은 부가가치를 낳는 기업을 만들어, 지속적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검찰 수사와 정치공방만으로 뒤범벅인 우리 정치가 귀담아들어야 할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