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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책방서 놀멍쉬멍, 제주가 더 깊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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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제주도에는 100개가 넘는 서점이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동네 책방은 30개 남짓이다. 학습지·참고서는 팔지 않고 독서 모임을 통해 마을과 교류하는 서점을 동네 책방이라고 한다. 제주의 동네 책방 대부분이 이주민이 운영하고 있다. 지난 8월 제주 동네 책방 22곳이 모여 ‘제주 동네책방 네트워크’를 꾸렸다. 단체 대표로 선임된 ‘시인의집’ 손세실리아(59) 대표와 여행자가 가볼 만한 제주 동네 책방 다섯 곳을 추렸다. 제주 동네 책방의 주요 고객이 제주 여행자다. 책과 함께하는 여행만큼 값진 여행도 없다.

시인의집

제주는 ‘책 섬’이다. 학습지·참고서를 안 파는 동네 책방만 30곳이 넘는다. 제주 동네 책방 대부분을 이주민이 운영하고, 제주 동네 책방 고객의 대부분을 제주 여행자가 차지한다. 사진은 제주의 대표적인 동네 책방 ‘시인의집’의 테라스.

제주는 ‘책 섬’이다. 학습지·참고서를 안 파는 동네 책방만 30곳이 넘는다. 제주 동네 책방 대부분을 이주민이 운영하고, 제주 동네 책방 고객의 대부분을 제주 여행자가 차지한다. 사진은 제주의 대표적인 동네 책방 ‘시인의집’의 테라스.

제주시 조천읍 골목길 안에 있는 ‘시인의집’은, 아마도 전국에서 하나뿐인 저자 친필 사인본 전문 서점이다. 중견 시인 손세실리아 대표가 제주에 내려와 2011년 처음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커피 내리고 피자 굽는 바닷가 카페였는데, 커피와 책을 함께 파는 북 카페로 변신했다.

변신하게 된 계기가 각별하다. 2013년 ‘시인의집’이 제주의 숨은 피자 맛집으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 이후 카페 앞 골목이 북새통을 이뤘다. 너무 많은 손님이 몰리자, 시인은 피자 장사를 접었다. 시인은 “돈을 벌려고 제주에 내려온 게 아니었다”며 “그 시절엔 시가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인의집’ 대표이자 제주 동네책방 네트워크 초대 대표 손세실리아 시인.

‘시인의집’ 대표이자 제주 동네책방 네트워크 초대 대표 손세실리아 시인.

‘시인의집’에는 300~400종의 책이 있다. 이 중에서 문학 서적이 85~90%이고 문학 서적 중에서 시집이 90%다. ‘시인의집’에서 판매 중인 책은 저자가 고인이거나 외국인이 아닌 이상 모두 저자 사인본이다. 곽재구 시인 시집은 100권 모두 다른 글귀가 적혀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집인 셈이다.

100년 묵은 폐가를 고쳐 들어간 ‘시인의집’은 바다와 바투 붙어 있다. 바다를 향해 난 창을 열면 파도가 들이칠 정도다. 시인의 딸(31)이 내려와 엄마를 돕고 있다. 엄마는 책을, 딸은 카페를 주로 담당한다. 정기 휴일은 따로 없으나 시인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 있어 방문하려면 미리 전화로 물어보는 게 좋다.

그림책방 노란우산

제주 최초의 그림책 전문 서점 ‘그림책방노란우산’의 정면 모습.

제주 최초의 그림책 전문 서점 ‘그림책방노란우산’의 정면 모습.

제주도 최초의 그림책 전문 책방이다. 대전에서 카페를 하던 김종원(48)·이진(44)씨 부부가 2015년 제주에 내려와 차렸다. 처음엔 카페였는데, 2016년 그림책 북카페로 탈바꿈했다. 아내 이진 대표가 16개월간 그림책 작가 과정을 이수하는 등 꼼꼼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그림책방노란우산’의 이진 대표.

‘그림책방노란우산’의 이진 대표.

‘그림책방 노란우산’은 작은 기적의 현장이다. 지난해 9월 화재로 서점이 건물 뼈대만 남긴 채 홀랑 다 탔다. 낡은 농가를 서점으로 고쳐 썼는데, 누전 사고가 일어났다. 발만 동동 구르던 부부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부부의 사연을 알게 된 전국 동네 책방들이 십시일반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책방 주인들은 작가와 출판사에 딱한 사정을 알렸고, 출판사는 독자에게 연락하면서 전국에서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불과 36시간 만에 6000만원이 모였다. 갑자기 큰돈이 모이는 바람에 서둘러 모금을 중단해야 했다. 모금 운동에 동참한 400여 명 중에는 장학금을 보낸 대학생도 있었고, 책방을 한 번도 안 들른 사람도 있었다. 이진 대표는 “고마운 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도까지 가서 그림책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의외로 손님이 많다. 그림책 매니어가 꽤 된단다. 그림책 테라피가 그림 치료보다 효과가 더 좋다는 것도 이번에 새로 알았다.

제주풀무질

‘제주풀무질’ 내부 모습. 멜로드라마 세트장처럼 예쁘다.

‘제주풀무질’ 내부 모습. 멜로드라마 세트장처럼 예쁘다.

제주도 동쪽 세화리 당근밭 복판에 들어선 사회과학 서점이다. 제주도에 사회과학 서점이라니. 의아해할 수 있으나 사연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떡여진다.

‘풀무질’은 서울 성균관대 앞에 있는 전설의 사회과학 서점이다. 그 서점을 26년간 운영했던 은종복(57) 대표가 2019년 제주도에 연 서점이 ‘제주풀무질’이다. 지금도 서울에 ‘풀무질’이 있으나, 새 주인에게 제주에서 서점을 내면 ‘풀무질’ 이름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제주풀무질’은 제주도 동쪽 세화리 당근밭 복판에 들어앉은 사회과학 서점이다.

‘제주풀무질’은 제주도 동쪽 세화리 당근밭 복판에 들어앉은 사회과학 서점이다.

은 대표가 처음 ‘제주풀무질’을 연 건 2019년 7월이고, 이 자리로 옮긴 건 지난해 7월이다. 이전 집주인이 갑자기 월세를 두 배 올리는 바람에 옮겨야 했다. 대출을 받아 지금 자리의 농가와 땅을 샀다. 은 대표는 “15년간 빚을 갚아야 하지만, 서점 한 지 28년 만에 처음으로 내 집에서 서점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풀무질’은 서울 ‘풀무질’과 달리 예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팽나무와 밭담, 그리고 당근밭이 액자 속 사진 같다. 제주풀무질을 찾는 손님의 70%가 제주 여행자라고 한다. 에세이와 어린이책, 문학 서적이 주로 나간다. 그렇다고 ‘풀무질’의 전통과 단절한 건 아니다. 서가 한쪽이 인문사회과학 서적으로 빼곡하다. 심지어 『자본론』도 있다. 은 대표에 따르면 ‘제주풀무질’은 제주에서 사회과학 서적이 제일 많은 서점이다.

보배책방

‘보배책방’의 책 소개 메모.

‘보배책방’의 책 소개 메모.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보배책방’의 정보배(51) 대표는 출판사 편집자 출신이다. 서울의 여러 출판사에서 23년간 인문·교양서를 만들다 2018년 제주로 내려왔다. 서점을 시작한 건 2019년, 지금의 자리로 온 건 올 5월이다.

책을 만들던 사람이 책을 파는 책방이라고 다른 게 있을까? 다른 게 많이 있다. 우선 ‘보배책방’은 책이 다양하다. 권수가 많지는 않다. 대신 다른 책방에는 없는 책이 많다. 인문·교양서가 다른 책방보다 많은 편인데, 환경이나 여성 관련 책이 특히 많다. 책방지기가 말이 많다는 것도 다른 책방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손님이 선뜻 책을 집지 못한다 싶으면 어김없이 책방지기가 출동한다.

‘보배책방’의 내부 모습. 1층과 2층을 헐어 독서 모임이 열리면 나무 계단을 좌석으로 활용한다.

‘보배책방’의 내부 모습. 1층과 2층을 헐어 독서 모임이 열리면 나무 계단을 좌석으로 활용한다.

‘보배책방’에선 행사와 모임도 수시로 열린다. 페미니즘 책을 읽은 모임, 시사 주간지를 읽는 모임, 북 토크, 북 콘서트, 저자와의 만남, 어린이 토론 수업 등등 ‘보배책방’에서 진행한 독서모임과 책 행사는 10개를 헤아린다. 4년째 한 번도 안 빼먹고 매달 이어온 독서 모임도 있다.

책 행사를 진행할 땐 책방지기의 출판사 시절 인맥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 이현 동화작가, 김추령 과학교사, 한미화 출판평론가 등 기꺼이 달려온 저자가 십수 명에 이른다. 책을 매개로 대화하고 교류하는 현장이란 점에서 ‘보배책방’은 제주 동네 책방의 모범 사례다.

헌책방 동림당

‘헌책방 동림당’의 송재웅 대표. 어렸을 때부터 헌책 사랑이 남달랐던 헌책 매니어다.

‘헌책방 동림당’의 송재웅 대표. 어렸을 때부터 헌책 사랑이 남달랐던 헌책 매니어다.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헌책방 동림당’은 제주 동네 책방 중 유일한 헌책방이다. ‘헌책방 동림당’은 헌책방이란 공간보다 송재웅(56) 대표의 유별한 헌책 사랑이 더 흥미진진한 곳이다.

송 대표는 옛것을 좋아하는 팔자로 태어난 듯하다. 어렸을 때부터 헌책이 그렇게 좋았단다. 중학생 때부터 어쩌다 돈이 생기면 헌책을 샀고, 고철을 팔아서 헌책을 산 적도 있었다. 대학에서도 역사를 전공했고, 중국 베이징의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박사 논문은 못 썼지만, 빈손은 아니었다. 8년 남짓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베이징의 중고시장을 뒤져서 구한 고서적을 잔뜩 갖고 들어왔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대학에서 역사 강의를 했고, 제주에는 2011년 내려왔다. 제주로 이사할 때 싣고 온 책의 무게가 10톤이 넘었단다. 제주에서 헌책방을 한 지 10년이 넘은 요즘은 옛날 그림이나 도자기도 많이 취급한다. 정식으로 골동품을 다루기 위해 문화재 취급 인가도 받았다.

제주 동네책방 산책

제주 동네책방 산책

송 대표는 현재 자신이 얼마나 많은 책을 가졌는지 모른다. 매장과 전시관, 그리고 창고 두 곳이 책으로 꽉 차 있다는 것만 안다. 제일 비싼 책의 가격도 모른다. 송 대표 컬렉션을 뒤지다 보면 어떤 보물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송 대표는 “지금도 책을 파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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