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올해 7번째 기준금리 인상은 베이비스텝(0.25%포인트)이었다. 긴축 기조는 이어가면서도 속도 조절을 택했다.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1.7%로 내려가는 등 경기 둔화 우려가 뚜렷해져서다. 시장의 '돈맥경화' 현상도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고물가·고금리 속에 경제 성장 전망까지 꺾이며 내년은 올해보다 힘든 한 해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24일 통화정책방향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3%에서 3.25%로 0.25%포인트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금통위원 만장일치 결정이다. 기준금리가 3.25% 수준으로 높아진 건 2012년 6월 이후 10년 5개월 만이다. 사상 첫 6회 연속(4·5·7·8·10·11월) 인상 결정이다.
한은은 올해 금리를 결정하는 8차례의 금통위 중 지난 2월(동결)을 제외하고 7번 금리를 올리며 긴축 페달을 꾸준히 밟아왔다. 한은은 올해에만 기준금리를 2.25%포인트(연 1%→3.25%) 인상했다. 미국과의 기준금리(연 3.75~4.0%) 격차는 상단 기준 0.75%포인트다.
한은이 긴축 속도 조절에 나선 건 통화정책의 무게추가 한· 미 금리 격차와 원화가치 방어 등에서 성장둔화 등 국내 요인으로 옮겨진 결과다. 이창용 총재는 “앞으로 경기 둔화 폭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외환부문의 리스크가 완화되고 단기금융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이 제약되고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한은이 보폭을 줄인 데는 채권시장의 '돈맥경화' 우려가 컸다. 이 총재는 “단기금융시장에서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등의 금리가 크게 상승하고 거래도 위축됐다”며 “기업어음(CP) 시장에서의 자금조달은 여전히 제약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레고랜드 사태에 대해 “금융시장에 불필요하고 과도한 신뢰상실이 생겨 당황스러웠다”고 평가했다. 이 총재는 이날 금리 인상 등 통화정책과 배치되지 않는 선에서 CP 시장에 대한 추가 지원 가능성도 시사했다.
한은이 긴축 감속에 나선 건 경기 둔화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다. 한은은 이날 발표한 수정경제전망에서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8월 전망치(2.1%)보다 0.4%포인트 낮춘 1.7%로 예상했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1.8%)와 국제통화기금(IMF·2.0%)의 전망치보다 낮다.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인 잠재성장률(2%)도 밑도는 수치다.
1%대 성장률은 충격적이다. 2%에 미치지 못하는 성장률을 기록한 건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0.7%), 세계 금융위기 때 2009년(0.8%),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5.1%), 2차 오일쇼크 때인 1980년(-1.6%) 등 4차례뿐이다.
성장률 전망치를 크게 낮춘 건 식어가는 수출 엔진 때문이다. 한은은 수출이 내년 상반기에 역성장(-3.7%)하는 등 연간 기준으로는 0.7%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급격한 긴축과 중국의 제로코로나 정책 등으로 수출 상대국의 수요가 줄고 있어서다.
한은은 주요 수출국의 내년 성장률을 미국 0.3%, 유럽연합 -0.2%, 중국 4.5% 등으로 전망했다. 이 총재는 “내년 성장률 하향조정 요인 대부분이 글로벌 경기 둔화폭 확대와 같은 대외요인에 기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 속 한국 경제가 한은 전망치인 1.7% 성장률을 달성하지 여부는 민간소비에 달려있다. 한은은 내년 민간소비가 올해보다 2.7% 늘어날 것으로 봤다. 올해 내내 이어진 보복소비가 내년에도 상당 부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이런 분석의 근거다.
다만 부동산 가격 하락과 대출 금리 상승 등에 따른 이자 비용 증가 등 가계가 지갑을 닫을 요인이 많다. 민간 소비마저 줄 경우 정부·기업·가계가 모두 돈 주머니를 단단히 동여맬 수 있다. 이미 정부는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40조원 가량 줄이며 긴축 기조로 돌아섰다. 기업의 설비투자도 한은 전망대로라면 내년에는 3.1% 역성장한다.
수출이 줄고 내수까지 꺾이면 한국 경제가 기댈 곳이 없게 된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년에는 성장률을 끌어올릴 부분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기 둔화의 먹구름은 짙어지고 있지만 물가는 좀처럼 내려가지 않을 전망이다. 한은은 내년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전년동월대비) 전망치를 기존 3.7%에서 3.6%로 0.1%포인트만 내렸다. 통상 경기가 식으면 수요 위축으로 가격이 내려가지만, 그동안 전기·가스요금 등에 누적된 비용 인상 요인이 이를 상쇄할 것이라는 게 이유다.
이 때문에 이 총재는 내년 초까지 5%대의 물가상승률을 전망했다.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물가 상승) 우려도 커지게 됐다. 다만 이 총재는 “경제성장률은 하반기부터 반등할 것이고, 물가도 하반기로 들어가면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며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르기는 과도하다”고 말했다.
경기 둔화 속에도 긴축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한은도 일단 고통스러운 긴축에 대한 결기를 다지고 있다. 이 총재는 이날 이례적으로 금통위원들이 생각하는 최종금리 수준을 공개했다.
이 총재를 제외한 6명의 금통위원의 최종 금리 전망은 연 3.25%(1명), 3.5%(3명), 3.5~3.75%(2명) 등으로 나뉘어 있다. 금통위원 중 다수는 적어도 내년 중 1차례 이상이 기준금리 인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조기금리 인하에 대해서도 시기상조라며 선을 그었다. 이 총재는 “최종 금리에 도달한 뒤에도 금리 인하를 위해서는 물가가 (한은의) 관리 목표(2%)로 수렴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인해야 금리 인하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통화정책의 운신 폭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번 인상으로 기준금리는 경기를 위축시키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급격한 금리 인상이 파급력이 시차를 두고 가계와 기업이 받은 변동금리 대출에도 반영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변동금리의 상단은 이미 8%대에 도달했다.
이 총재도 이날 “금리가 많이 올라가고 경기도 나빠져 경제 주체들의 고통이 심해지는 것은 잘 알고 있다”며 “한은도 금리를 빨리 안정화시키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