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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엄마'됐다…미성년자녀 둔 성전환자 '성별 변경' 허용 [가족의자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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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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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A씨. 그는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기르거나 여성의 옷을 입는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여자 친구들이 더 많았다. 사춘기 이후 남성적으로 변해가는 얼굴 형태와 체격, 목소리에 A씨는 고통을 느꼈다.

그를 딸이 아닌 ‘아들’로 여겨온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인식. A씨는 남들과 다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초‧중‧고를 마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았다.

지난 2012년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도 낳았지만 6년 만에 헤어졌다. 결혼 이듬해인 지난 2013년 그는 정신과에서 정식으로 ‘성주체성장애’(성전환증)‘ 진단을 받고 호르몬 치료를 받았다. 이혼하고 몇 달 뒤(지난 2018년 11월) 그는 마침내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그는 현재까지 ‘여자’로 산다. 아직 성인이 아닌 A씨의 10살 남짓한 아이들도 A씨의 성전환 수술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아버지가 아닌 고모로 알고 있다.

미성년 자녀 둔 성전환자…원심 “자녀의 정신적 혼란, 충격”

A씨는 “가족관계등록부 성별란에 ‘남’으로 기록된 것을 ‘여’로 정정하도록 허가해달라”며 등록부 정정 신청을 냈지만, 1·2심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같은 결정은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는 경우 성별 정정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2011년 9월 전원합의체 판례를 따른 것이다.

2심은 “이를 허용하면 자녀 입장에선 아버지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뒤바뀌는 상황을 일방적으로 감내해야 하고, 이로 인한 정신적 혼란과 충격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가족관계 증명서의 ‘부(父)’란에 기재된 사람의 성별이 ‘여’로 표시되면서 동성혼의 외관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며 “미성년 자녀는 취학 등을 위해 가족관계 증명서가 필요할 때마다 이 같은 증명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데 현실에 대한 적응능력이 성숙되지 아니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미성년 자녀를 아직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은 동성혼 문제에 노출되게 하는 것은 친권자로서 기본적인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다.

성전환자 관련 대법원 주요 판결의 변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성전환자 관련 대법원 주요 판결의 변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법, 11년 만 미성년 자녀 둔 성전환자 성별변경 첫 허용…“행복추구권”

그러나 24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A씨의 등록부 정정 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가정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미성년 자녀가 있거나 배우자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불허했던 전합의 판단이 11년 만에 일부 뒤집힌 것이다.

대법원은 성전환자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를 두고 ‘성전환자의 기본권 보호와 미성년 자녀의 보호 및 복리와의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여러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쟁점은 ‘현재 ‘이혼 상태인(혼인 중에 있지 아니한) 성전환자’라는 점이 됐다. 성별정정은 성전환을 마친 성전환자의 실제 상황을 받아들인 것일 뿐, 성전환자인 부 또는 모와 그 미성년 자녀 사이의 신분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거나 권리의무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취지에서다. 대법원은 “성전환자와 그의 미성년 자녀는 성별정정 전후를 가리지 않고 개인적·사회적·법률적으로 친자관계에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심의 판단에는 “헌법 제10조 전문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헌법 제11조 제1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상 기본권 및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 기준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 24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김재형 전 대법관이 퇴임한 이후 약 3달여 만에 대법관 12명이 참여한 상태로 진행됐다.   한편 국회는 이날 본회의에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상정해 인준 표결한다.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 24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김재형 전 대법관이 퇴임한 이후 약 3달여 만에 대법관 12명이 참여한 상태로 진행됐다. 한편 국회는 이날 본회의에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상정해 인준 표결한다. 뉴스1

소수의 반대 의견(이동원 대법관)으로는 “성전환자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 성별정정을 불허하는 것이 우리 법체계 및 미성년자인 자녀의 복리에 적합하고, 사회 일반의 통념에도 들어맞는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입장이 제시되기도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가 ‘혼인 중이 아닌 상태’에 있음에도 성별 정정을 불허하는 것은, 오히려 성전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더욱 고착화하는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그 자녀에게 더욱 차별과 편견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짐을 지우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법은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할 때 그 존재 의의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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