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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조차 안 남기고 죽은 영재 아들…1020 이런 죽음 급증,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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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8월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서울시자살예방센터 주최로 열린 ‘서울 청년의 생명을 살려라’ 100인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적어 놓은 응원의 메시지가 붙어 있다. 뉴스1

지난 8월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서울시자살예방센터 주최로 열린 ‘서울 청년의 생명을 살려라’ 100인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적어 놓은 응원의 메시지가 붙어 있다. 뉴스1

 생명 그 소중함을 위하여

A(17)군은 어려서부터 영재로 불렸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초등 3~4학년 수학문제를 풀어냈고 영어동화책을 술술 읽었다. 뭘 시켜도 잘 따라가는 A군을 보면서 A군 부모는 욕심을 냈고, 초등 고학년이 되자 의대 입학을 목표로 공부 계획을 짰다. A군은 중학생 때도 묵묵히 공부만 했다. 친구들이 게임에 빠져들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부모와 이런저런 갈등을 겪을 때도 순하기만한 아들이었다. 그러던 A군이 목표로 하던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 성적이 점점 떨어지고 학교에 가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히는 날이 늘었다. 갑자기 폭발해 부모를 향해 폭언을 하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A군은 어느날 가출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B(28)씨는 대학 졸업 뒤 한 여행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지만 월세 보증금이 두 사람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어머니의 소득이라곤 기초연금 뿐인 상태였다. 두 모녀는 B씨가 번 돈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뒤 여행업계가 초토화되면서 B씨는 직장을 잃게 됐다. 이후 그는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했다. 이런 와중 B씨 어머니가 지병으로 숨졌다. 홀로 남겨진 B씨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는 “희망이 없다”는 글을 남기고 집에서 목숨을 끊었다.

최근 5년간 A군과 B씨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청소년ㆍ청년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자살은 2011년 정점(10만명당 31.7명)을 찍은 뒤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변함없이 OECD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나마 전체 자살률은 25명대 안팎을 오가며 정체중인데 10~20대 자살률은 계속 늘고 있다. 지난해 10대 자살률은 10만명당 7.1명, 20대 자살률은 23.5명으로 2020년 대비 각각 10.1%, 8.5% 급증했다. 2017년과 비교하면 50%가량 뛰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문가들은 1020의 자살률 증가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이들 세대의 정신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경고라고 말한다. 신의진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현장에서 보면 최근 청소년, 청년층의 정신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는게 눈에 띈다”라며 “과거 대학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에는 조절되지 않는 조현병 환자 등이 주로 입원했는데 요즘에는 자살ㆍ자해를 시도한 청소년으로 가득하다”라고 전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라며 “과도한 공부 압박 등 부모의 정서적 학대로 시름시름 앓다가, 여기에 더해 학교에서 따돌림 등 학교폭력 등을 당하면서 자살 충동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설명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의 SNS 기반 청소년 상담 ‘다들어줄개’의 전영숙 상담팀장은 “하루 평균 150~200명의 10~20대가 상담을 청한다”라고 말했다. 상담 이후 경찰 개입으로 자살시도를 막아낸 사례가 이달에만 7건에 달한다. 전 팀장은 “예전보다 우울증, 공황장애 등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라며 그 원인으로 “가족 간 갈등이 크고, 학교에서 대인관계 어려움 겪는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청소년기 신체적 성장은 빠른데 부모는 권위적이고, 대인관계까지 어려워지면서 정신병리학적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2017년 69만1164명에서 지난해 93만3481명으로 5년새 35.1% 늘었다. 전반적으로 환자가 늘었지만, 10~20대 환자 증가폭이 유독 컸다. 20대는 2017년 7만8016명에서 2021년 17만7166명으로 무려 127.1% 뛰었다. 10대는 3만273명에서 5만7587명으로 90% 늘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과거 고성장 시기에는 직업을 구하기 어렵지 않았고, 지금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질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저성장 시대에 돌입한 이후 청년들의 기대에 맞는 좋은 일자리는 적고 미래에 대해서도 낙관하기 어려워졌다”라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기성세대는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라고 착각하는데 요즘 청년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고생을 덜할지는 몰라도 고민은 훨씬 큰 세대”라며 “그간 청년세대의 불안을 가족 단위에서 해결해왔으나 핵가족화, 1인가구 증가로 더는 가족이 완충장치가 되지 못한다”라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사태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양두석 안실련 자살예방센터장은 “코로나19 대유행 때 자살이 반짝 줄었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장기화에 따라 국민들 특히 10~20대의 전반적인 정신건강 상태가 악화됐고, 일상회복이 차츰 이뤄지면서 자살이 급증하는 후폭풍이 몰려올 우려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10대, 2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현실을 바꾸려면 당장 대책이 절실하다. 신의진 교수는 “아이들은 치료만 제대로 하면 예후(결과)가 좋다. 조기개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초ㆍ중ㆍ고등학교, 대학교, 지자체별로 학생과 청년 정신건강을 확인하고 치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적절한 치료를 빨리 지원하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백종우 교수는 “미래세대인 청소년, 청년세대의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라며 “선진국들도 앞서 이런 현상을 겪은 뒤 10~20대 정신건강을 위한 제도가 마련됐다”라고 말했다. 백 교수는 “영국ㆍ호주는 지하철역 근처 등에 전혀 병원같지 않은 정신건강 클리닉을 마련하고 ‘헤드스페이스(머리 위 빈 공간)’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년층의 상담ㆍ치료 접근성을 높인 것”이라며 국내 도입을 제안했다.

※ 중앙일보·안실련·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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