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책에 바치는 찬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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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는 내가 서울에서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거대한 지하 미로 같은 통로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세대의 한국 독자들에게 인기 있는 책이 무엇인지 눈여겨보곤 한다. 다양한 번역서, 눈에 띄게 전시된 도서, 세계적 베스트셀러 후보작 등 한국에서 유독 두각을 나타내는 해외 작품들이 뭔지 살펴본다. 이곳에선 휴대폰으로 글을 읽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쓰고 이를 ‘독서’라 부르는 현대사회에서 책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줘 마음도 편안해진다. 서울이나 워싱턴 지하철 출퇴근길에서 휴대폰을 보는 대신 독서를 하는 소수의 특이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항상 반가운 일이다. 그럴 때면 그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몰래 훔쳐보곤 한다.

나는 몇 년 전 미국외교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의 도서 선정위원회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도 바로 수락했다. 이 위원회는 매년 ‘미국 외교 활동에 관한 우수 도서’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역대 수상작 중에서 한·미 관계와 대북 협상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 한국 외교 관련 도서 두 권을 발견했다.

한·미 관계, 대북 문제 이해 넓힐
놀랍고 파격적인 우수도서 많아
한국 독자들도 번역서뿐 아니라
정치·외교 해외서적 두루 접하길

첫 번째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미국대사의 회고록 『깊숙한 개입, 제한된 영향력: 카터와 위기의 한국』이다. 2000년 수상작품인 이 책은 그가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대사로 일했던 한국에서의 경험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다른 한 권은 2005년 수상작인 『북핵 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협상』(조엘 위트·다니엘 포네만·로버트 갈루치 공저)이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미국과 북한의 첫 번째 실질적 외교협상을 거쳐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역사적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책이다.

다른 수상작들도 살펴보면 아카데미가 미국 외교의 성공이나 외교관 출신 저자들의 탁월함을 의례적으로 축하하기 위해 상을 수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외교활동이 얼마나 까다롭고 불완전한지 잘 보여주거나 아카데미가 표현하는 것처럼 ‘외교가 제공하는 기회와 한계에 초점을 맞춘’ 도서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올해는 한국이나 아시아에 특화된 출품작은 없었지만 교훈을 얻고 선택할 만한 후보들은 많았다. 마리 요바노비치 전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의 회고록 『변방에서 얻은 교훈』과 피오나 힐 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유럽·러시아 담당 고문의 『여기 당신을 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트럼프 정부 시절 두 여성의 전문성과 진실성을 용기있게 담고 있는 파격적인 작품들이다. 트럼프 정부 이전 이들의 빛나는 삶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도 들어있다. 성별에 상관없이 외교관이나 공무원을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헨리 키신저와 중동 외교를 다룬 책도 있었고 독일 통일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확장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조치와 실수에 관한 도발적인 서적 『1인치도 용납되지 않는』도 후보 중 하나였다.

2022년 수상작은 스팀슨센터의 공동 설립자인 마이클 크레폰의 『핵 평화의 승리와 패배: 군비 통제의 흥망성쇠와 부활』이다. 이 책은 고강도 줄타기 외교, 일촉즉발 위기, 끈질긴 집념, 엄청난 성공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시에 트루먼 시대부터 트럼프 시대까지 군비통제 예찬론자들과 핵억제 예찬론자들 간의 대격돌, 아이러니한 반전과 예상치 못한 결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이 북한과 관련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혹자는 ‘군비통제’라는 단어를 읽고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북한이나 이란에 관한 게 아니다. 외교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를 살펴보는데 더 적합하다.

책을 권하는 차원에서 외교 분야는 아니지만 더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 두 권을 더 소개한다. 교보문고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해외 서적이 많지만 나는 더 많은 독자들이 한국에만 국한되지 말고 정치·외교 관련 책들을 두루 접하길 권한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는 모이제스 나임 전 베네수엘라 통상산업부 장관이 저술한 『권력의 복수: 21세기에는 독재자들이 어떻게 정치를 재창조하는가』이다. 한·미동맹이 ‘가치동맹’으로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저자가 ‘3P’라고 묘사한 포퓰리즘(populism)·양극화(polarization)·탈진실(post-truth)은 한·미 양국뿐 아니라 이 ‘3P’가 다른 국가에서는 어떤 상황인지 공통의 관심과 대응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다. 이는 공동의 도전 과제이며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보존해야 할 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두 번째는 이번 주 백범김구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 한국에 오면서 다시 읽고 있는 책.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이다. 외교관이 쓴 회고록은 아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처럼 외교관 역할을 해야만 했던 한국 민족주의 정치인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격동의 세월을 보낸 한국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시절의 혼란과 외교를 다룬 영문서적이 앞으로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오늘날의 더 나은 정치와 더 나은 외교에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