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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성장’ ‘공정’의 덫에 발목 잡힌 박정희·문재인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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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프레임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금과옥조와 같은 책이다. 정치에서 프레임이라고 하는 사회 여론의 생각 틀을 어떻게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다양한 프레임이 형성되었고, 그 프레임이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신탁통치 파동, 이념대결의 씨앗

첫 번째 사례는 ‘신탁통치 파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은 신탁통치안이고, 신탁통치안은 소련이 주장했다’는 오보로 인해 당시 모든 문제가 ‘신탁통치’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란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이념적 분열의 기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살아난 것은 친일 문제를 덮을 수 있었던 보수 세력이었지만,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계획했고 보수세력들을 파트너로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했지만, 보수세력의 반탁운동으로 인해 신탁통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신탁통치라는 프레임은 결국 해방 이후 친일잔재 척결, 전쟁범죄 처벌 문제를 모두 흡수해버렸고, 분단정부 수립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김구가 신탁통치 프레임의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었다는 역설적 결과도 주목된다.

정치는 ‘여론의 생각틀’ 장악 다툼
해방 이후 수많은 ‘프레임’ 이어져

인위적 프레임, 정반대 결과 낳아
최근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 키워

믿고 싶은 것만 볼 때 ‘가짜’ 판쳐
진실 드러나지만 그 폐해도 극심

경제제일주의에 갇힌 민주주의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4·19 혁명은 1950년대의 독재와 부패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세워야 한다는 프레임 속에서 가능했다. 이 프레임은 곧 이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이후 기존 정치인들은 부패하며, 경제성장이 제일 중요하다는 프레임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프레임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토착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18년 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18년은 ‘수출입국’ ‘선성장 후통일’ ‘자주국방’ ‘중화학공업화’ ‘100억불 수출’이라는 정부가 만들어낸 성공적 프레임과 함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이라는 인식과 함께 의원내각제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만들어냈다. 아울러 민주당 정부가 추진했던 경제제일주의와 경제개발계획은 박정희 정부의 프레임 속에 묻혔다.

물론 군사정부가 만들어냈던 프레임이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3년 군사정부의 ‘군정연장’과 함께 1987년 초의 ‘호헌 선언’은 정부가 의도한 대로 프레임이 형성되지 않은 대표적인 경우였다. 전자가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다면, 후자는 ‘탁 치차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이 탄로 나면서 실패했다. 5·16이 4·19를 계승하고 있다는 프레임도 청구권 자금과 관련된 ‘김 오히라 메모’ 한 방으로 무너졌다.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 맞나

민주화 이후 언론의 역할이 커지면서 인위적으로 프레임을 만들어가려는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단순히 ‘유언비어’로 사회적 프레임이 만들어지던 시기와 달라진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한국 현대사의 과정을 건국,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선진화 과정으로 단계화한 것이다. 이 논의는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진행되며, 이 과정을 통해 건국이 완성되어간다는 사실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오히려 산업화 시대에 있었던 인권탄압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의로 작동될 여지도 있었다. 산업화가 되어야만 민주화가 되기 때문에 산업화 시기의 민주주의 문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보통 사람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 프레임 안에 갇혔다. 보통 사람의 이미지는 노태우 정부를 탈냉전기 민주화 시기 과도기적이며 무능한 정부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있었던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 비핵화 선언, 인천공항과 고속철도, 분당과 일산의 신도시 개발사업 등의 성과는 모두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속에 묻혔다.

종북 좌파와 초원복집 사건

민주화 이후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이 계획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반대로 흘러간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1994년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이나 ‘조문파동’, 그리고 ‘유서대필 사건’은 공안정국 프레임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보수 세력 내에서 ‘종북’ ‘친북’이 진보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반면 1992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부산 ‘초원복집’ 사건은 이를 폭로한 언론의 의도와는 정반대 결과를 가져왔다. 한 언론에서 특정 지역의 지방주의를 부추김으로써 선거에 승리하고자 한 정부 여당의 의도를 폭로했지만, 오히려 특정 지역의 위기의식 속에서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대중 정부 시기의 ‘남북 정상회담’, 이명박 정부에서는 ‘천안함 사건’은 그 직후에 실시된 선거가 정부 여당에 유리하게 작동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오히려 역풍이 불었다. 1996년의 북풍이 성공적인 선거 결과를 가져오자 남북관계를 프레임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 남북관계는 더 이상 선거에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지 못했다.

박정희·문재인, 성공한 프레임의 덫

박근혜 정부에서 있었던 불법 사찰 폭로 역시 주목되는 사건이다. 사찰의 ‘불법’이 사건의 핵심임에도 정부여당과 검찰은 ‘사찰’보다 청와대의 비밀을 공개했다는 직무규정 ‘위반’으로 프레임을 만들었다. 복무규정 위반 프레임은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사건이 폭로되면서 더 이상 복무규정 위반 프레임이 작동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다는 프레임으로 70%가 넘는 지지로 출발했다. 그러나 법무부장관 청문회,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문제 등으로 인해 성공했던 ‘공정’의 프레임이 덫으로 작동하면서 정권 재창출 실패했다. 경제성장의 프레임으로 유지된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말 경제위기 속에서 무너졌던 것도 비슷한 결과였다.

프레임은 이렇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프레임을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언론매체가 통제되었던 시기에는 소문이 중요했다. ‘유언비어’가 그중 하나다. 최근에는 유사한 여론조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일정한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만들려 한다는 합리적 의심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해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프레임이기도 하다. 또한 일정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작업이 그 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특히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조작’이 작동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 애초의 목적과는 정반대 프레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코끼리’ 속에 묻혀버린 진실

모든 정치세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진실’이 묻힌다. 물론 그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이 지나면 그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신탁통치 논쟁의 진실도, 유서대필 사건의 진실도, 프레임 전환을 위해 시도되었던 수많은 조작사건의 진실도 30여 년이 지난 후 밝혀졌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문제는 왜곡된 프레임이 한국 사회에 엄청난 부작용을 만들어냈고,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프레임을 바꾸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또 다른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적 프레임이 양분되어 있다는 현실은 또 다른 고민이다. 뉴스 소비자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프레임 밖에 있는 뉴스는 아예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과 다른 프레임에서 나온 뉴스들은 모두 거짓으로 규정해 버린다. 양분된 프레임으로 인해 당분간 압도적인 ‘코끼리’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지금 바로 잡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수십 년 후 가짜 뉴스가 만들어낸 프레임의 부작용을 바로잡기 위해 또 다른 비용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엄정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프레임의 대상인 국민 하나하나가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