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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은 재벌집 막내아들…'이생망' MZ세대 홀린 '인생 리셋'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인기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오른쪽)을 원작으로 하는 JTBC 드라마는 재벌 그룹 비서로 일하던 윤현우(송중기)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뒤 그 재벌가의 막내 손자로 깨어나 복수를 계획하는 판타지 회귀물이다. 사진 JTBC, 네이버시리즈 캡처

인기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오른쪽)을 원작으로 하는 JTBC 드라마는 재벌 그룹 비서로 일하던 윤현우(송중기)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뒤 그 재벌가의 막내 손자로 깨어나 복수를 계획하는 판타지 회귀물이다. 사진 JTBC, 네이버시리즈 캡처

‘나를 죽인 가문의 핏줄로 다시 태어나다.’

지난 18일 첫 방송을 한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한 홍보문구다. 이 문구대로 드라마는 재벌 총수 일가의 충직한 비서로 일하던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뒤 그 가문의 막내 손자로 회귀해 복수를 준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아직 3회까지 밖에 방영되지 않았지만, 주인공 윤현우(송중기)가 한번 죽고 순양그룹 일가의 막내 진도준으로 깨어난 뒤 대학생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지닌 채 재벌가 손자가 된 윤현우가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신임을 얻으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1회 6.1%(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로 출발한 시청률은 3회에서 10.8%까지 올랐다.

현생을 기억한 채 다시 태어난다? 당연히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이지만, 비슷한 ‘회귀 서사’를 지닌 드라마들은 잇따라 안방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4~5월 방영된 SBS ‘어게인 마이 라이프’ 역시 권력자의 비리를 조사하던 검사 김희우(이준기)가 살해당한 뒤 2회차 인생을 살게 되며 복수를 해나가는 회귀물이었다. 죽기 15년 전으로 돌아간 김희우가 그간 알게 된 미래 사건들을 활용해 권력자를 응징하는 과정이 카타르시스를 안기며 최고 시청률 12%(15회)를 기록한 뒤 막을 내렸다.

“개인 의지로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카타르시스”

지난 12일 종영한 MBC ‘금수저’는 과거로 돌아가는 회귀는 아니지만, 흙수저로 태어난 이승천(육성재)이 우연히 얻게 된 금수저를 통해 부잣집 친구와 부모를 바꾸며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판타지를 그렸다. 시청률은 5~7%대에 그쳤지만, 9월 4주차 TV 드라마 화제성 순위(굿데이터코퍼레이션 집계)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방영 기간 내내 높은 화제성을 보였다.

SBS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왼쪽), MBC 드라마 '금수저'는 주인공이 기존 인생과 다른 운명을 살 기회를 얻는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는 2030세대의 좌절과 욕망을 비춘다. 사진 SBS, MBC

SBS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왼쪽), MBC 드라마 '금수저'는 주인공이 기존 인생과 다른 운명을 살 기회를 얻는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는 2030세대의 좌절과 욕망을 비춘다. 사진 SBS, MBC

주인공의 직업, 신분 변동의 계기 등 구체적인 설정은 가지각색이지만, 큰 틀에서는 기존 인생에서 고통 받던 인물이 손쉽게 인생을 ‘리셋’한 뒤 두 번째 기회를 얻는 줄거리의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같은 말이 유행할 정도로 20·30세대가 좌절감에 젖어 있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같이 계층 간 불평등이 극심해진 현실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구성원 전반이 공유하는 ‘사회적 감정’이 돼버렸다”며 “개인의 의지로 삶을 바꾸기 어려운 상황에서 문화 콘텐트에서라도 카타르시스와 통쾌함을 느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진 현실에서, 아무리 ‘노오력’해도 타고난 조건을 바꿀 수 없다는 청년 세대의 절망과 '삶을 리셋하고 싶다'는 욕망이 회귀물과 같은 판타지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환생·빙의까지…‘회빙환’이 공식 된 웹소설

회귀 서사는 드라마 쪽에서는 새로운 바람이지만, 웹소설·웹툰 세계에서는 이미 하나의 주요 장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어게인 마이 라이프’도 각각 2017년과 2015년부터 연재된 동명의 인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인터넷 하위문화로 여겨지던 분야에서 시작된 장르가 각광받기 시작하며 주류 문화인 TV 드라마에 창의적 에너지를 주입하게 된 셈이다.

23일 네이버시리즈 월간 웹소설 랭킹 1~10위에 올라있는 내 작품들은 전부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설정 중 하나 이상을 담고 있다. 사진 네이버시리즈 캡처

23일 네이버시리즈 월간 웹소설 랭킹 1~10위에 올라있는 내 작품들은 전부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설정 중 하나 이상을 담고 있다. 사진 네이버시리즈 캡처

2010년대 중반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회귀 서사 웹소설의 인기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이 단순히 ‘회귀’하는 것 뿐 아니라 ‘빙의’하거나 ‘환생’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며 이들을 하나로 묶어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이라 칭하는 용어가 굳어지기도 했다. 회귀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면, 다른 인물에 영혼이 들어가는 설정이 빙의, 아예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는 환생이라는 차이가 있다. 네이버의 만화·웹소설 플랫폼 네이버시리즈 월간 웹소설 랭킹(23일 기준)에 올라있는 ‘화산귀환’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 ‘전지적 독자 시점’ 등 10위 내 작품들이 전부 ‘회·빙·환’ 코드를 담고 있을 정도로 인생 리셋 서사는 웹소설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지난 9월 웹소설 창작 입문서 『웹소설 입문』(컴북스캠퍼스)을 펴낸 조형래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독자들이 웹소설에서 재미를 얻는 핵심 요소는 ‘대리 만족’인데, 이를 실현시키는 장치로서 ‘회귀·빙의·환생’이 활용되는 것”이라며 “이제 웹소설에서 회귀·빙의·환생하는 일은 당연한 공식이 됐기 때문에 이런 판타지 설정을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게임에서 캐릭터가 마법을 부리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이같은 회귀물이 언제까지 사랑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계층 이동은 물론 소박한 꿈조차 꾸기 어려워진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대중적 상상력의 중요한 원천이 된 것은 맞다고 본다”며 “요즘엔 순정 만화나 로맨스 판타지 등 다양한 웹소설 장르에도 '회·빙·환' 설정이 결합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코드를 활용한 현대 로맨스 드라마 등의 작품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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