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헌책 10톤 싣고 제주 내려왔다…값 알 수 없는 귀한 책 수두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제주 동네책방 산책⑤ 헌책방 동림당

제주시 삼도2동 '헌책방 동림당'은 헌책 매니어 송재웅 대표가 꾸민 책의 나라다. 지하 1층 헌책방 매장에서 송 대표가 포즈를 취했다.

제주시 삼도2동 '헌책방 동림당'은 헌책 매니어 송재웅 대표가 꾸민 책의 나라다. 지하 1층 헌책방 매장에서 송 대표가 포즈를 취했다.

소위 ‘구제주’라 불리는 제주시 삼도2동 주택가. 1층에 고기국수 집이 있는 사거리 3층 건물에 ‘헌책방 동림당’이 있다. 제주 동네책방 네트워크에서 활동 중인 동네 책방 중 유일한 헌책방이다.

‘헌책방 동림당’ 건물을 처음 방문하면 일단 멈칫하게 된다. 1층 고기국수 집 옆으로 계단이 나 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헌책방 동림당’이 쓰여 있다. 계단 입구에서 서성거릴 때 마침 송재웅(56) 대표가 나타났다. 지하층은 헌책 사고파는 책방이고, 2층은 희귀본 헌책과 각종 골동품을 모아둔 전시관이란다. 송 대표가 2층으로 안내했다.

관련기사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의 모습. 옛날 책도 많지만, 그림과 도자기 등 골동품도 많다.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의 모습. 옛날 책도 많지만, 그림과 도자기 등 골동품도 많다.

전시관 문을 여니 책 냄새가 확 끼쳤다. 퀴퀴하면서도 편안해지는, 왠지 기분 좋은 그 냄새. 2층 전시관은 책보다 그림·도자기가 더 많았다. 송 대표가 “전시관엔 책이 별로 없다”며 “창고 두 곳에 책이 꽉 차 있다”고 말했다. “책이 얼마나 있느냐”고 묻자 “모른다”고 답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송 대표야말로 기인 열전에 나올 법한 인물이다. 책을 좋아하는, 그것도 헌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송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헌책이 좋았단다. 이유는 똑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좋았단다. 중학생 때부터 어쩌다 돈이 생기면 헌책을 샀고, 그것으로는 부족해 고철 따위를 팔아서 헌책을 사 모았다. “무슨 책을 샀느냐”고 물었더니 “『서양철학사』처럼 제목이 멋있는 책을 샀다”며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송 대표는 옛것을 좋아하는 팔자가 분명하다. 그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중국 베이징의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박사 논문은 못 썼지만, 빈손은 아니었다. 8년 남짓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고려대장경』『조선총독부관보』『승정원일기』 같은 고서적을 잔뜩 사 갖고 들어왔다. 주말마다 베이징의 중고시장을 뒤져 구한 책들이다. 유학생활도 넉넉했던 게 아니어서 밥값을 아껴 돈을 모았단다. 나중에 비싸게 팔 생각을 하고 악착같이 책을 모은 건 아니었다. 그저 책이 좋아서였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여러 대학에서 역사 강의를 했고, 제주에는 2011년 내려왔다. 제주로 내려올 때 옮긴 책의 무게가 10톤이 넘었단다.

'헌책방 동림당' 지하 1층 매장 모습. 책 냄새와 종이 냄새로 가득하다.

'헌책방 동림당' 지하 1층 매장 모습. 책 냄새와 종이 냄새로 가득하다.

엄밀히 말하면 육지에서 먼저 헌책방을 시작했다. 제주에 내려오기 1년쯤 전, 중고거래 사이트에 헌책 5000종을 올려놨었다. 온라인 서점도 서점이라지만, 책 가게를 낸 건 물론 제주에 내려와서다. 제주시 노형동 아파트 지하상가에서 처음 책방을 열었다. 책을 쌓아둘 공간이 부족해 복도에 내놨다가 민원이 들어와 201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노형동 상가는 지금 창고로 쓰고 있다. ‘동림당’이란 책방 이름은 두 아이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동림당(東林黨)은 중국 명나라 때 환관 정치에 반발한 유학자들 모임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헌책방을 한 게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제주에서도 인맥이 생겨 여기저기에서 헌책을 사 가라고 연락이 옵니다. 사실 요즘엔 책보다는 그림이나 도자기 같은 골동품이 더 많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문화재 취급인가도 받았습니다.”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에 있는 문충성 선생의 시집과 시작 노트.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에 있는 문충성 선생의 시집과 시작 노트.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에 있는 이해인 수녀의 『민들레의 영토』 초판 시집.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에 있는 이해인 수녀의 『민들레의 영토』 초판 시집.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에 있는 이외수 작가의 그림. 작가가 젊었을 적 그렸던 그림으로 추정한다.

'헌책방 동림당' 2층 전시관에 있는 이외수 작가의 그림. 작가가 젊었을 적 그렸던 그림으로 추정한다.

동양화 액자가 빼곡한 2층 전시관에 제주시인 문충성(1938~2018)의 시집이 여러 권 놓여 있었다. 유족들이 고인의 서가를 정리하다 송 대표의 헌책방까지 흘러들어온 책이라고 했다. 고인의 유작 중에는 시인이 1994년 발표한『섬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와 시작 노트도 있었다. 검은색과 빨간색, 파란색 사인펜으로 여러 번 고쳐 쓴 흔적이 고스란했다. 이해인 수녀가 1976년 발표한 시집 『민들레의 영토』 초판본도 보였고, 지난 4월 돌아간 이외수(1946~2022) 작가의 초기 그림도 걸려 있었다.

'헌책방 동림당'의 송재웅 대표. 2층 전시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헌책방 동림당'의 송재웅 대표. 2층 전시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송 대표에게 “제일 비싼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이 질문에도 그는 시원한 답을 못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1950년대 발간한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모두 400권이란다. 이 책을 얼마에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책이 수두룩하단다. 대신 뜻깊은 책은 알려줬다. 『충의신휘(忠義新彙)』 수고본(手稿本)이다. 하천 김용식 선생이 1911년 일일이 옮겨 쓴『충의신휘』으로, 『충의신휘』는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전국 유림의 상소를 모은 책이다. 책에는 우국지사 최익현(1833∼1906), 송병선(1836∼1905), 민영환 1861∼1905) 선생의 상소문도 들어 있다.

세상의 모든 낡은 것에는 사연이 배어 있다. 사연은 결국 사람이 세상에 남긴 흔적이다. 송 대표는 지금도 책을 파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그만큼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로 들렸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