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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선희의 문화예술톡

‘테헤란 피에 잠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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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선희 초이앤초이 갤러리 대표

최선희 초이앤초이 갤러리 대표

코비드로 중단되었던 미술 축제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고 전 세계에서는 기존 메이저 아트 페어를 중심으로 미술 축제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달 유럽에서는 영국의 프리즈 아트 페어와 아트 바젤이 파리에 새롭게 론칭한 파리 플러스 아트 페어가 열리면서 미술계가 활기를 되찾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축제 중에 세계를 놀라게 한 예술가 중 한 명은 이란 출신의 익명의 예술가였다. 그는 이란 테헤란 시내에 위치한 더네쉬 거주 공원을 비롯하여 중심가 공원 몇 곳의 분수대의 물을 붉게 물들이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의 제목은 ‘테헤란 피에 잠기다’라고 전해졌다. 지난 9월 16일 쿠르드족 여성인 마흐사 아미니 (22세)가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테헤란에서 ‘도덕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고 있다.

전 세계 주요 뉴스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간 이 소식은 그 어떤 정치인들의 목소리보다 큰 영향력을 지니면서 현재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을 멈추고자 하는 세계인의 참여를 적극 끌어내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 요소인 물은 바로 생명을 상징한다. 피로 오염된 물은 마실 수가 없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인간의 생명은 위협받는다.

테헤란 분수 물들인 익명의 작가
이란 당국의 인권 탄압에 저항
생명을 걸고 싸우는 이란 예술가
‘여성의 자유’ 표현한 작품 잇따라

이란 테헤란 시내 분수를 붉게 물들인 ‘테헤란, 피에 잠기다’. 익명의 작품이다. [AFP=연합뉴스]

이란 테헤란 시내 분수를 붉게 물들인 ‘테헤란, 피에 잠기다’. 익명의 작품이다. [AFP=연합뉴스]

이 익명의 이란 작가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고 구타당하고 목숨을 잃어야 하는 사회는 피로 오염된 물이 고인 분수대와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물론 이 작가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고 그의 신분이 절대로 노출돼서도 안된다.

프리즈 아트 페어 기간 런던 리전트 파크에 설치된 조각들 옆에 세계 유명 작가들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팻말에 새겨진 것과 대조적으로 이 작품은 보호받지 못한 채 가장 절실하고 위험스럽게 세상을 향해 외치는 예술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 관한 소식이 전해진 이후 다른 이란 출신의 예술가들 또한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있고, 이란의 미술대학 학생들은 지난달 29일 이런 현 정부의 인권탄압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600명이 서명했던 이 성명서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현재 6000명이 넘는 미술계 인사들이 서명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꼭대기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의 12개의 배너가 12명으로 구성된 익명의 작가 그룹에 의해 제작되고 설치되었다. 마샤 아미니의 초상화가 찍힌 이 배너에는 ‘여성, 삶, 자유’라는 슬로건이 적혀있고 현 이란의 상황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미술계를 일깨우고 있다.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란을 대표하는 여성작가인 쉐린 내샤트를 비롯한 이란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 작가들이 이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란 정부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술가들의 주도로 비판과 변화에 대한 항의가 적극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로 영상 작업을 통해 이란의 상황, 특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제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신분과 자유에 대한 회귀를 염원하는 작품을 만들어온 쉐린 내샤트는 1979년 이슬람 정권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1979년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고 결국 자유와 평등이 위협받는 이란 사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망명한 예술가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녀는 ‘망명자’라는 신분이기에 이란의 이슬람 정권의 부조리함과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비롯한 이란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비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란을 벗어나지 못한 예술가들은 자유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비밀스럽게 이어가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예술의 힘은 정치의 힘에 비하면 연약하고 부조리한 권력을 바꾸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싸움은 기나긴 세월과 탄압과 맞서야 한다.

과연 이란의 예술가들, 히잡을 거부하는 여성들, 정권을 비판하는 무고한 시민들은 도덕 경찰과 시위대를 향해 쏟아지는 총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최선희 초이앤초이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