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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선수들 침묵으로 '시위 연대'…"승리 원치 않아" 여론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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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이란 축구대표팀이 전 세계 시선이 집중된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고 침묵했다.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히잡 의문사’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행동으로 풀이된다.

이란, 월드컵에서 국가 제창 거부 

이란 선수들이 21일 카타르 칼리파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잉글랜드와 경기를 앞두고 그라운드에 나왔다. 이들은 국가가 나오자 제창하지 않고 침묵했다. AFP=연합뉴스

이란 선수들이 21일 카타르 칼리파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잉글랜드와 경기를 앞두고 그라운드에 나왔다. 이들은 국가가 나오자 제창하지 않고 침묵했다. AFP=연합뉴스

이란 축구대표팀은 21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경기 시작 전, 국가 연주가 나왔어도 부르지 않았다. AP 통신은 "이란 국영 TV는 선수들 얼굴 대신 경기장 전경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AFP 통신은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지지 의사를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이란 선수들은 골 세리머니도 하지 않았다. 이란은 잉글랜드에 2-6으로 졌다.

이란에선 두 달 넘게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 13일 여대생 마흐사 아미니(22)가 히잡 등 이슬람 율법이 요구하는 복장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 경찰에 끌려가 사흘 만에 의문사한 뒤, 전국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란 정부가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유혈진압을 하면서 미국, 유럽 등으로 연대 시위가 퍼지고 있다.

축구대표팀의 국가 제창 거부에 관중석에 있는 수천 명의 이란 팬 중 일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고 도이치벨레(DW)가 전했다. 관중석에는 ‘여성, 삶, 자유’(Women Life Freedom)라는 플래카드도 내걸렸고, 이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이란 팬들도 많았다. 페르시아어로 ‘자유’를 뜻하는 ‘아자디’라는 구호도 터져 나왔다. 사망한 여대생 아미니의 나이 22세에 맞춰 전반 22분에는 일부 팬들이 아미니의 이름을 연호했다.

유로스포츠에 따르면 최근 비치사커·농구·배구·수구 등의 이란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국가 제창을 거부했다. 이런 기류가 축구 월드컵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18일 이란 축구대표팀 공격수 알리레자 자한바흐시는 "국가 제창에 대해선 팀에서 결정해야 하는 부분인데, 우리끼리 이미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주장 에산 하지사피도 20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이란의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며 이들을 지지하고 공감한다"고 밝혔다.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은 잉글랜드전 이후 "선수들도 최근 (시위) 상황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면서 "선수들은 단지 축구를 하고 싶어하지만, 이 문제(시위)에 대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케이로스 감독은 월드컵 개막 전부터 이런 분위기를 인정하고 "월드컵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항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이란 축구팬이 21일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잉글랜드와 경기에서 '여성, 삶, 자유, 마흐사 아미니' 등이 써 있는 걸개를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란 축구팬이 21일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잉글랜드와 경기에서 '여성, 삶, 자유, 마흐사 아미니' 등이 써 있는 걸개를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러나 이란 축구대표팀이 계속 시위를 지지하는 행동을 한다면 처벌받을 수 있다. 이란축구협회는 이달 초 "국가 규정과 올림픽 윤리 강령 및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경기장에서 정치적 행동을 피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을 시 규정에 따라 처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CNN은 "월드컵에서의 시위는 이란 선수들에게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면서 "그들의 생계·미래·수입 등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美와 대결…이란 정부, 반전 기회 노려

이란 축구팬이 21일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이란-잉글랜드 경기에 앞서 경기장 밖에서 '여성 삶 자유' 문구가 있는 패널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란 축구팬이 21일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이란-잉글랜드 경기에 앞서 경기장 밖에서 '여성 삶 자유' 문구가 있는 패널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대표팀 선수와 감독, 이란 팬 등이 반정부 시위에 연대하고 있지만 이란 정부는 오히려 카타르 월드컵을 여론 일신의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다. 특히 조별리그에서 적대 관계인 미국, 영국(잉글랜드·웨일스) 팀과 만나는 데 주목한다. 이란은 이날 잉글랜드에 이어 25일 웨일스, 29일에는 미국과 대결한다.

이란 국영 이르나 통신에 따르면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개막 전 선수단을 불러 "월드컵에서 대표팀의 노력은 적국(미국 등)의 계략에 빠져 있는 이란 국민의 공감과 단결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또 이란 정부는 적국에 대항하는 대표팀을 응원하도록 국민들을 독려하고 있다고 AP가 전했다.

BBC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파격적인 대진표"라면서 "이란은 특히 미국과 대결하면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미국을 2-1로 이겼을 때 불러왔던 엄청난 국가 자부심을 되살리려고 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란 팬들은 월드컵을 반전 도구로 삼으려는 이란 정부를 규탄했다. 가디언은 "월드컵을 보러 카타르를 찾은 대부분의 이란인은 정부에 분노했고, 경기장 밖에선 시위 조짐도 보였다"고 전했다. 월드컵 현장에 온 한 이란 팬은 "영국 등을 이기면 선수들이 대통령 축하를 받는 등 축구가 정부의 선전 도구로 활용될 수 있어서 우리 팀이 이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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