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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둘째 아들, 그라운드에선 레전드 2세

중앙일보

입력

미국 티모시 웨아가 22일(한국시간)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B조 웨일스와 1차전에서 전반 선제골을 터뜨린 뒤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티모시 웨아가 22일(한국시간)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B조 웨일스와 1차전에서 전반 선제골을 터뜨린 뒤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아프리카 축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흑표범’ 조지 웨아(56·라이베리아)다.

웨아는 아프리카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로 꼽힌다. 건장한 신체조건(신장 1m85㎝·체중 88㎏)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력과 타고난 골 결정력을 앞세워 1980년대 라이베리아 무대를 휘저었다. 이어 1988년에는 아르센 벵거(73·프랑스) 감독에게 발탁돼 AS 모나코 유니폼을 입은 뒤 파리 생제르맹과 AC 밀란, 맨체스터 시티 등 유럽축구 명문 구단을 거치면서 세계적인 골잡이로 발돋움했다.

새 역사도 여럿 썼다. 1994~199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1995년에는 아프리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발롱도르와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이처럼 세계적인 선수로 우뚝 선 웨아를 사랑했다. 축구 영웅을 향한 존경심도 컸지만, 웨아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도 적잖이 작용했다. 빈민촌에서 자란 웨아는 가난과 싸워야 했다. 또, 가정 문제로 부모님이 아닌 할머니의 손에서 키워졌다. 그러나 남들처럼 쉽게 주저앉지 않았고, 축구를 통해 아픔을 지워나갔다.

이러한 스토리는 2003년 은퇴 후 웨아가 돌연 정치인의 길을 걷는 배경이 된다. 이전까지 정치 경력은 없었지만, 빈곤 퇴치를 기치로 내걸고 지지층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어 2005년 11월 라이베리아 대통령 후보로 나서며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했고, 2017년 10월 대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아 이듬해 1월 제2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축구선수 출신인 조지 웨아 라이베리아 대통령. AFP=연합뉴스

축구선수 출신인 조지 웨아 라이베리아 대통령. AFP=연합뉴스

이처럼 축구선수로도, 정치인으로도 남부러울 것 없는 업적을 모두 이룬 웨아. 그러나 끝내 풀지 못한 한(恨)이 있었다. 바로 국가대표로서의 성공, 특히 월드컵에서의 활약이다. 1987년 처음 나라를 대표한 웨아는 국가대표로선 이렇다 할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라이베리아가 워낙 약체였던 탓에 국제대회 중심과는 늘 거리가 있었고, 결국 월드컵 본선 무대를 한 차례도 밟지 못한 채 은퇴했다.

그러나 이 오랜 한을 풀어줄 이가 마침내 나타났다. 바로 자신의 둘째 아들인 티모시웨아(22·미국)다. 아버지를 따라 축구선수로서 선천적인 재능을 뽐낸 아들 웨아는 22일(한국시간) 열린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B조 웨일스와 1차전에서 득점을 터뜨리며 자신의 월드컵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웨아는 아버지의 조국인 라이베리아가 아닌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비록 출생지는 다르지만, 실력만큼은 아버지를 똑 닮아 어릴 때부터 뛰어난 스피드와 골잡이 본능을 자랑했다.

파리 생제르맹 유스팀에서 기량을 쌓은 웨아는 2017년 성인팀으로 데뷔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기간 미국 연령별 대표팀에서도 함께 활약했고, 2018년부터는 미국 국가대표로 발탁돼 국제대회를 누볐다.

이어 이번 대회에서도 미국을 대표하게 된 웨아는 월드컵 데뷔전에서 마침내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펼쳤다. 0-0으로 맞선 전반 36분 크리스티안 풀리치의 침투 패스를 침착하게 연결해 상대 골망을 갈랐다. 웨아 부자의 월드컵 첫 번째 골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첫 번째 승리까지는 맛보지 못했다. 후반 37분 가레스 베일이 페널티킥으로 미국의 골망을 흔들었고, 경기는 결국 1-1 무승부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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