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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 조합장 '문자 투표' 가능했다…선거효력 法 판단은 [그법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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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비밀 투표’는 어린 학생들의 반장선거 때부터 가르칠 만큼 아주 중요한 원칙이지요. 그런데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법적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멀리 있는 선거인이 기표용지를 찍어서 선거관리위원에게 미리 문자로 보내면 어떨까요? 선거관리위원이 이걸 그때마다 인쇄해서 보관하고 있었다면요?

최근 법원이 어느 재건축정비사업조합장의 선거 과정을 문제 삼은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재판부는 일상 속 선거에서도 왜 공정의 원칙이 중요한지를 들여다봤죠. ‘그법알’에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인 지난 6월1일 서울 도봉구 르노삼성자동차 도봉사업소에 마련된 도봉2동 제5투표소 모습. 뉴스1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인 지난 6월1일 서울 도봉구 르노삼성자동차 도봉사업소에 마련된 도봉2동 제5투표소 모습. 뉴스1

[그법알 사건번호 114] 기표 용지 찍어서 문자 전송…선거 효력 있을까

올해 초 이 조합은 새 조합장을 뽑기로 했고, 후보로는 3명이 나섰다고 합니다. 조합은 지난 3월에 정기총회를 열어 조합장 선출 안건을 올려 처리하기로 하죠. 세 명의 후보는 정기총회 전날까지 15일간의 선거운동을 합니다.

투표는 여러 방식이 가능했습니다. 정기총회 당일에 현장 투표를 할 수 있고, 현장 투표를 못 하는 사람들은 기표 용지가 담긴 서면결의서를 우편 등으로 낼 수 있었죠. 이 서면결의서는 총회에 직접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조합의 정관 등에 따르면 조합장 선출을 위해서는 총회 당일 의결정족수가 충족돼야 하는데, 조합원들은 이 서면결의서로 출석을 대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총회 당일에 갑자기 A 후보가 사퇴합니다. 자신과 B 후보가 표를 나눠 먹는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큰데, C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막아야 하니 자신이 사퇴하겠다고요. 만일 자신에게 투표해 서면결의서를 보낸 사람이 있다면 이를 철회하고 현장에서 B 후보를 찍어달라는 겁니다. 물론 조합 내에서도 C 후보의 진영과 A·B 후보의 진영은 팽팽히 대립하던 상태였고요.

당시 조합원 약 2500여명 중 1900여명이 서면결의서를 낸 상태였는데요. A 후보의 이 문자를 받고 약 200명이 서면결의서 제출을 철회하고 총회 현장에서 직접 투표를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100표 차이로 B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어느 조합원이 이 선거에 문제를 제기해 법적 다툼에 나섰습니다. 당선된 조합장의 직무 집행을 정지해달라고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한 겁니다.

법원 판단은?

서울중앙지법 민사51부(부장 전보성)는 이 조합원의 신청을 일부 받아들여 조합장의 직무 집행을 정지했다고 22일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비밀투표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고, 선거 방식도 규정을 지키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판결문에는 투표 방식이 좀 더 자세하게 드러나 있는데요. 알고 보니 이 선거, ‘문자 투표’가 가능했습니다. 조합의 선거관리위원회가 “우편 투표 회송 방법은 직접제출, 우편발송, 팩스전송, 전자메일송부, 문자 사진 전송의 방법으로 한다”고 결의한 건데요. 조합원들이 투표용지에 기표해 사진을 찍어 문자메시지나 팩스로 보내도 됐던 겁니다. 물론 이는 조합의 정관이나 선거관리규정에 근거가 없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조합원이 이 문자메시지로 기표용지를 제출했다고 합니다.

 아파트 이미지. 중앙일보

아파트 이미지. 중앙일보

조합의 선관위는 문자가 올 때마다 기표용지를 종이에 인쇄해서, 우편으로 온 다른 기표용지들과 보관했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개표가 시작되기 전부터 집계가 가능했던 거죠. 재판부는 이것이 조합이 스스로 규정에 정해둔 비밀투표 원칙을 어긴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조합장 측은 “문자메시지를 출력하는 과정에서 선거관리위원이 기표 내용을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비밀투표 원칙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합의 선거관리규정에 따르면 개표 개시 이후에야 투표함을 개봉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문자투표는 이를 어긴 것이 되니까요.

게다가 일단 기표 용지를 사전에 집계할 수 있다면 공정의 원칙에 반하는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총회를 여는 쪽이 미리 기표 상황을 파악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된다면 총회를 연기할 수도 있고요. 재판부는 A 후보자가 돌연 사퇴한 것 역시 이 같은 방식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기표 결과를 미리 파악하고 있던 B 후보자가 A 후보자에게 미리 연락해 선거에 개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의심이 든다”라는 겁니다.

재판부는 “조합장 선거에 공직선거법과 같은 엄격한 비밀투표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운 면이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비밀투표에 의해서 보장하려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가치가 현저히 훼손될 정도에 이르렀다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문자로도, 팩스로도 보낼 수 있는 이 ‘서면결의서’는 재건축·재개발 조합에서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습니다. 한창 위조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죠. 같은 지적에 따라 지난해 11월 도시정비법이 바뀌어, 서면결의서에 대한 본인확인 제도가 시행됐습니다. 이번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 역시 지난 3월 다른 사건에서 “서면결의서 본인 확인을 하지 않은 총회는 무효”라는 취지로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도 본인 확인 제도를 철저히 지킬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습니다. “지장을 날인하게 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본인확인이 가능하다고 볼 수 없고 진위 확인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법알

‘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법률 세상을 우리 생활 주변의 사건 이야기로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 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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