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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정치의 품격 나라의 품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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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주필

최훈 주필

“갑작스러운 상실은 뒤를 돌아보게 합니다. 동시에 앞을 보게 합니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한 반성·논의라면 우리가 잃은 이들만큼의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충분히 겸손해야 합니다. 정치적 이해나 점수 따기의 수단, 다음 뉴스 시간의 사소한 기삿거리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서로의 말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공감의 본성을 단련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희생을 명예롭게 해주는 방식입니다.”

우리 누군가의 이태원 희생에 대한 성찰이 아니다. 11년 전 미 투산 총기난사의 희생자 추도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 연설이다. 총기 규제와 범행 음모를 놓고 격렬히 싸우던 나라의 앞날과 희생자들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사고 25일 째, 정략·면피로 날을 세우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착하게 좀 사세요” “그럼 죄를 짓지 말든지” “암덩어리” “입에서 오물이 튀어나온다” “허접한 잡설 입닫아라”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평생 남 뒷조사나 해서 감옥에 처넣은 검사가” “너나 잘하세요”···.

우리 국회의 적나라한 민낯들이다. “행정부조차 전 정권의 알박기 인사가 가득해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게 중진 여당 의원이 전한 민의의 전당이다. 윗물 탓일까. 모두의 상처 보듬어야 할 성직자들까지 가세한다. “대통령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마지 않는다”고. 섬뜩하다. 찢긴 유족의 가슴 아랑곳 않고 희생자의 이름을 흩뿌린다.

분열과 증오 일상화된 사회
윗물인 정치의 탐욕이 진원
함께 추락 국격도 만신창이
공감·통합으로의 회복 절실

하루라도 화 안 내면 손해본다. 분노의 금단현상이다. 사회학자들 표현대로 ‘세계 유일의 화병(Hwabyeong)이란 걸 지닌 앵그리 사회’다. 증오의 앙금인 우리의 한 해 고소·고발은 49만 건으로 일본의 50배다. 조국 사태 직후인 2020년 12월엔 정치권의 소송 남발로 월 5만 건을 넘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역대 최고였다. 진원? 정치다. 이념·지지정당·빈부·남녀·학력·세대·종교 등 7개 항목의 갈등 체감지수가 모두 1위(영국 킹스칼리지, 2021년 조사)인 세계 선두권의 오명으로 이어져 왔다. 같은 국기, 다른 부족들로 갈리며 ‘국가란 무엇인가’ 의문은 퍼져 간다.

분열의 씨앗, 우리 땅에 많이 뿌려져 왔던 건 사실이다. 전체 반상(班常)의 구도였던 조선은 그 자체가 양극화 사회였다. 식민지 시대 일본은 대한제국 출신의 고위 관리들 중용하며 고의적 갈라놓기를 악화시켰다. 급기야 “인민의 평등”을 유혹한 북한 공산주의와의 분단, 전쟁의 치명적 상처가 내재됐다. 인권침해, 정경유착은 박정희 근대화 속도의 후유증이었다. 늘어난 풍요 속에 힘센 자, 가진 자를 향한 불신도 자라갔다. 산업화 주축과 민주화 세력의 오락가락 쟁투 속에 한 발짝의 전진 없는 통합이었다. 최악의 인사·정책 갈라치기의 문재인 정부부터는 헤어나오기 힘든 갈등의 수렁 속 꼴이다. 나라의 품격도 함께···. 1인 가구, 고립된 개인화의 시대 흐름에 따라 소득·세대·성별·정체성의 등 돌리기도 가속이다. 곳곳이 적대적 공존뿐이다.

그러니 정치의 책임이다. 국가의 품격? 정치의 그것에 비례할 뿐이다. 시대가 여의도와 용산에 요구하는 품격은 공감(共感)이다. 내편으로의 묻지마 공감만이 지금의 우리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이해·존중해 보려는 것이 진정한 공감이다. 스스로 정직해야 가능한 격이다. 또 하나는 정파나 자기보다 국가와 공동체를 우선하려는 통합이다. 헌신, 자기희생을 우선해야 할 터다.

2008년 미 대선후보인 존 매케인에게 한 청중이 “(경쟁 후보인) 아랍인인 오바마를 믿을 수 없다”고 외쳤다. 매케인은 즉각 “아니다. 그는 품위 있는 가정의 시민이다. 단지 나는 근본적 이슈에 대한 의견이 그와 다를 뿐”이라고 꾸짖었다. 반대가 극심했던 이라크 증파안을 지지하면서 “조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내가 대선에서 지는 게 낫다”고 했다. 그대로 그는 졌다. 매케인의 사후, 언론들은 그러나 “그는 정파보다 국가를 늘 우선했다(He put country over party). 애국이었다”고 기록했다.

기민당의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가장 빛난 장면도 이 지점이다. 그는 2015년 사민당 슈뢰더 전 총리의 자서전 발표회를 직접 찾아갔다. 이색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슈뢰더의 노동·복지 개혁이 독일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며 “현재 국가의 성공은 슈뢰더의 헌신이 뿌리였다”고 평가한다. 혁신적인 하르츠 개혁으로 재집권에 실패한 슈뢰더가 정권을 넘겨줬던 경쟁자는 메르켈이었다. 자신의 후임 총리로 내정된 사민당 숄츠를 자신의 마지막 G20 정상회의에 데려가 타국 정상들과의 소통을 도와줬다. 메르켈의 품격이었다.

품격도 습관이다. 한국 정치 74년, 민주화 35년. 이런 사례를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마음속에 믿음이 아로새겨진 공감과 존중, 통합의 기억. 별로 없다. 사람과 사회, 국가의 품격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부디 후대들이라도 품격 사회의 시민 대접 받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나라의 운명 좀 생각하며 사시라. 정치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