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최측근 정진상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구속 이후 첫 공개석상에서 꺼낸 화두는 검찰 수사가 아닌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였다. 이 대표는 2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생과 경제는 백척간두의 위기인데, 정부의 인식과 대응은 천하태평처럼 보인다. IMF 국난 극복 당시에 무능·무대책·무책임으로 일관하면서 위기를 은폐하던 모습과 너무 많이 닮았다”고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이 대표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읽어내려간 4분 10초 분량의 모두발언엔 정 실장과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 등 최측근의 잇따른 구속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 대표는 다만 “위기 극복에 써야 할 국가 역량을 야당 파괴에 허비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검찰 독재 정권의 어떤 탄압에도 민주당은 흔들림 없이 민생과 경제를 챙기고 평화와 안보를 지켜나가겠다”며 검찰 수사를 ‘야당 파괴’, ‘독재 정권의 탄압’에 빗댔다.
이날 이 대표는 유일한 공개일정인 최고위원회의가 끝나고도 1시간 40분이 지나고 나서야 대표실을 나섰다. 대표실 앞 복도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이 ‘측근 구속에 유감 표명이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만, 이 대표는 입을 굳게 닫았다.
李 대신 지도부 총력 대응…“야당 파괴, 용인 않겠다”
대신 반격에 나선 건 민주당 지도부였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김 부원장과 정 실장 구속의 본질은 윤석열 정권 차원의 ‘이재명 죽이기’”라며 “민주당은 이재명 죽이기, 야당 파괴 행위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임선숙 최고위원도 “대장동 사건을 매개로 한 검찰 독재정권의 야당 탄압, 조작수사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날 진행된 대장동 의혹 핵심 관계자 남욱 변호사의 배임 혐의 공판에서 이 대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끌어올렸다. 검찰이 2013년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에 3억5200만원을 전달한 이유를 묻자, 남 변호사는 “본인이 쓸 돈이 아니고, 높은 분에게 드려야 할 돈이라는 말을 나중에 하셨다”고 답했다. “더 높은 분이 누구냐”는 검찰 측 질문에 남 변호사는 자신의 추측을 전제로 “정진상, 김용으로 알고 있다. 그 이상은 모른다”고 말했다.
남 변호사의 ‘폭탄 진술’이 알려지자 이번엔 안호영 민주당 수석대변인이 나섰다. 안 대변인은 이날 오후 서면 논평을 내고 “대장동 일당의 하나인 남 변호사가 재판에서 말도 되지 않는 황당한 주장을 늘어놓았다”며 “삼인성호(三人成虎)로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윤석열 검찰 특유의 조작수법”이라고 주장했다.
술렁이는 野…조응천 “李 대표 직접 해명할 상황”
지도부의 적극적인 방어에도 이날 민주당 내부에선 종일 술렁이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정 실장 구속으로 이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이날 오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대표가 정말 무관한지 그건 솔직히 잘 알 도리가 없다”며 “이제는 (이 대표가) 어느 정도 직접 해명해야 할 상황에 이르지 않았나, 그리고 최측근 2명이 연이어 구속된 데 대해 최소한 ‘물의를 일으켜서 미안하다’는 유감 정도는 표시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내에서 이 대표를 향한 유감 표명 요구가 제기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 일각에선 이 대표 취임 직전 논란이 됐던 ‘당헌 80조’를 다시 꺼내기도 했다. 민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당헌 80조가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기소와 동시에 정지하도록 한 만큼, 정 실장과 김 부원장에 대한 적용 여부를 검토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용진 의원도 “과거 사법리스크로부터 당을 보호하기 위한 본인들의 결단이 상당히 있었다. 당헌 80조 적용 문제를 논의해야 할 때”라며 이런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이에 대해 문진석 당 전략기획위원장은 이날 오후 당 고위전략회의를 마친 뒤 기자들에게 관련 질문을 받고 “(두 사람은) 비합리 광풍의 시대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 당헌(80조)를 적용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 이 대표 책임론이 공개적으로 거론되진 않는다. 친문 성향의 한 초선 의원은 “아직 남 변호사의 진술 내용 등을 사실로 볼 건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고, 친문 성향의 또 다른 서울 지역 의원도 “속으로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