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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세화리 당근밭 복판에는…『자본론』 파는 책방이 있다

중앙일보

입력

제주 동네책방 산책③ 제주풀무질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 당근밭 사이에 있는 동네 책방 '제주풀무질'. 서울 성대 앞 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을 26년간 맡았던 은종복 대표가 제주에 내려와 다시 시작한 서점이다. 사회과학 전문 서점은 아니지만, 제주도의 어떤 서점보다 사회과학 서적이 많다.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 당근밭 사이에 있는 동네 책방 '제주풀무질'. 서울 성대 앞 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을 26년간 맡았던 은종복 대표가 제주에 내려와 다시 시작한 서점이다. 사회과학 전문 서점은 아니지만, 제주도의 어떤 서점보다 사회과학 서적이 많다.

‘풀무질’이라는 서점이 있다. 40년 가까이 서울 성균관대 앞을 지키고 있는 사회과학 서점이다. 1980∼90년대 성대를 다닌 학생에게 풀무질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풀무질은 성대생의 사랑방이자 아지트였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성대생은 풀무질 벽 메모판에 약속 쪽지를 써 붙였고, 『공산당 선언』 같은 소위 ‘불온서적’을 사 읽었고, 집회가 있는 날이면 몰래 유인물을 숨기기도 했다. 대학가에서 사회과학 서점이 하나둘 문을 닫아도 풀무질만큼은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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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풀무질 은종복 대표. 1993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성대 앞 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을 운영했던 주인공이다. 제주에 내려와 다시 풀무질을 열었다.

제주풀무질 은종복 대표. 1993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성대 앞 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을 운영했던 주인공이다. 제주에 내려와 다시 풀무질을 열었다.

그 풀무질을 26년간 지켰던 주인공이 은종복(57)씨다. 정확히 1993년 4월 1일부터 2019년 6월 11일까지 26년 2개월 11일간 책방지기였다. 풀무질을 맡았을 때 스물여덟 살 청년이었던 은씨는 쉰네 날 중년이 되어 풀무질에서 나왔다. 성대 앞 풀무질의 산증인이었던 은 대표가 제주도에 내려와 차린 서점이 ‘제주풀무질’이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당근밭 복판에 들어앉아 있다.

“다른 사회과학 서점처럼 풀무질도 어려웠어요. 월세만 겨우 내고 있었으니까요.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 버텼는데, 한 번은 아들 명의로 2000만원을 대출받았다가 아내에게 들켰어요. 아내가 가족과 서점 중에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결국 가족을 택했습니다. 어머니 도움으로 마련했던 아파트를 팔아 빚 1억5000만원을 갚고, 풀무질을 맡겠다고 나선 청년들에게 넘겼어요. 그리고 제주도로 내려왔습니다. 제주에 연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주에서 작은 책방을 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풀무질이란 이름은 지키고 싶었어요. 서울 풀무질을 새로 맡은 친구들이 제가 제주에서 풀무질이란 이름을 쓸 수 있게 허락해줬습니다.”

제주풀무질은 세화리 당근밭 사이에 있다. 50년 묵은 농가를 고쳐 서점을 냈다.

제주풀무질은 세화리 당근밭 사이에 있다. 50년 묵은 농가를 고쳐 서점을 냈다.

제주풀무질 뒷마당. 여느 제주 농가처럼 생겼지만 제주도에서 사회과학 서적이 제일 많은 서점이다.

제주풀무질 뒷마당. 여느 제주 농가처럼 생겼지만 제주도에서 사회과학 서적이 제일 많은 서점이다.

은 대표가 제주에서 풀무질을 연 건 2019년 7월 25일이다. 같은 동네지만, 지금의 자리는 아니었다. 2년간 그럭저럭 서점을 꾸려왔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월세를 두 배 올려 버렸다. 고민 끝에 대출을 받아 당근밭 사이 50년 묵은 농가와 주변 땅을 샀다. 농가는 고쳐 서점으로 쓰고, 농가 뒤편에 살림집을 마련했다. 지금 자리에서 풀무질을 연 건 2021년 7월 1일이다. 은 대표는 “15년간 은행 빚을 갚아야 하지만, 서점 한 지 28년 만에 처음으로 내 집에서 서점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풀무질은 멜로 드라마 세트장처럼 예쁘다. 당근밭을 바라보고 낸 창문 앞이 포토 존이다.

제주풀무질은 멜로 드라마 세트장처럼 예쁘다. 당근밭을 바라보고 낸 창문 앞이 포토 존이다.

제주풀무질 인문사회과학 서적 서가에서 바라본 당근밭.

제주풀무질 인문사회과학 서적 서가에서 바라본 당근밭.

제주풀무질은 서울 풀무질과 여러모로 다르다.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다. 하얗게 칠한 서점 내부는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하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팽나무와 밭담, 그리고 당근밭이 액자 속 사진 같다. 제주풀무질을 찾는 손님의 70%가 관광객이라고 했다. 에세이와 어린이책, 문학 서적이 주로 나간단다. 은 대표 얼굴도 훨씬 좋아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빚을 이고 사는데, 말투와 몸짓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몇 년 전에 술을 끊었고 채식을 한다”고 말했다.

제주풀무질이 풀무질의 전통과 단절한 건 아니다. 서가 한쪽이 인문사회과학 서적으로 빼곡하다. 눈길이 가장 잘 가는 자리에『자본론』이 꽂혀 있다. “『자본론』을 사 간 사람이 있느냐” 물었더니 “물론이다”는 답이 돌아왔다. 은 대표는 “제주풀무질이 제주에서 사회과학 서적이 제일 많은 서점”이라며 “제주 대학의 교수와 학생도 주요 고객”이라고 말했다.

풀무질의 예전 모습들. 오른쪽 그림이 성대 앞 풀무질 모습이고, 왼쪽 그림이 은종복 대표가 제주에 내려와 처음 열었던 제주풀무질의 모습이다. 지난해 7월 지금 자리로 옮겼다.

풀무질의 예전 모습들. 오른쪽 그림이 성대 앞 풀무질 모습이고, 왼쪽 그림이 은종복 대표가 제주에 내려와 처음 열었던 제주풀무질의 모습이다. 지난해 7월 지금 자리로 옮겼다.

은 대표가 제주풀무질에서 가장 공들이는 건 독서모임이다. 10개나 되는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다. 절반은 온라인 모임이지만, 한 달 일정이 각종 모임으로 꽉 차 있다. 독서모임에서 주로 읽는 책은 생태와 기후 관련 서적이다. 은 대표는 “제주에 내려와서 환경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며 “무분별한 난개발을 막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문득 궁금했다. 26년 세월과 맞바꿨던 책방을, 그것도 돈 안 되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그는 왜 놓지 못하는 걸까.

“돈 벌 욕심으로 서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책을 통해 조금씩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 서점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와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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