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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쪽지예산에 보내는 AI의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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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인공지능(AI) 정치 도전 이어져
유럽인 4분의 1 “AI 결정 선호”
국회 쪽지예산·카톡예산 경계령

임종주 논설위원

임종주 논설위원

지난 1일 덴마크 총선은 밍크 살처분 사태가 빚은 조기 선거였다. 2020년 밍크 농장에서 코로나 19 변이가 잇따라 나오자 덴마크 정부는 그해 11월, 1700만 마리에 이르는 자국 내 밍크 전부를 살처분하기로 했다. 인간 감염을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지만, 세계 최대 덴마크 밍크 산업은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런데, 미감염 동물까지 모두 살처분한 결정은 불법이라는 내용의 의회 조사보고서가 지난 6월 발표됐다. 비난 여론으로 궁지에 몰린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는 조기 총선으로 승부수를 띄웠고 단 한 석, 간발의 차로 재집권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초토화한 밍크 산업은 회복의 길이 요원하다.

지난 2020년 말 코로나 19 변이의 인간 전파 우려로 살처분되는 덴마크 밍크. AFP=연합뉴스

지난 2020년 말 코로나 19 변이의 인간 전파 우려로 살처분되는 덴마크 밍크. AFP=연합뉴스

만약 인공지능(AI)이 살처분 여부를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생뚱맞듯 가정적 자문을 해본 건 덴마크 총선에서 밍크 스캔들 못지않게 AI 정당의 첫 의석 도전이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리더 라스’라는 이름의 AI 챗봇이 이끄는 합성당(The Synthetic Party)이 그 주인공이다. 예술가와 기술 전문가 그룹이 AI와의 공존을 표방하며 지난 5월 창당했다. 정치 혐오와 무관심 유권자 20%를 겨냥해 그들의 가치를 기반으로 프로그램했다고 한다. 기본소득 월 10만 크로네(1800여만 원) 지급 등의 공약도 내놨다.

지난 2019년 9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시내의 모습. 최승표 기자

지난 2019년 9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시내의 모습. 최승표 기자

앞선 궁금증을 풀려고 보낸 이메일에 합성당 공동창립자 아스커 브릴드 스타우내스 씨가 대표로 회신을 보내왔다. “AI 당수 라스는 밍크 살처분에 대해 확신을 갖고 말할 만큼 충분히 알지는 못하나 프레데릭센 총리가 어렵지만 필요한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서면 인터뷰는 지난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일문일답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총선 도전 평가는? “선거인 2만 명 서명 등의 조건 충족 미달로 투표용지에 당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리더 라스'와의 수많은 상호 작용을 통해 AI의 정치적 담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됐다.”
-향후 계획은? “우리 당을 각국 AI 정당이 참여하는 국제 조직으로 키우기 위해 펀드를 조성하고 있다.”
-한국의 AI 정당 가능성은? “현대 기술의 고접근성으로 한국도 AI 기반 정치 플랫폼을 쉽게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관심 있는 모든 이와 협력을 추구할 것이다.”
AI 정당의 첫 제도권 진입 시도는 이렇게 좌절됐지만, 정치 도전사에는 또 하나의 자취를 남겼다. 앞서 2017년 뉴질랜드에서는 세계 첫 AI 정치인 샘이 등장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고안한 샘은 방대한 여론 데이터 처리를 통해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공언했다. 한 해 뒤 일본에선 도쿄도 타마시 시장선거에 AI 후보 마츠다 미치히토가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AI 후보 앨리샤가 수만 명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선 도전을 선언한 바 있다.
AI 대안 정치론의 기저에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 무관심이 짙게 깔려 있다. 탐욕과 질투,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치인보다는 AI의 선택이 더 합리적이고, 신뢰의 무게도 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비스트에 매수될 염려도 없고, 인간관계의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 유럽인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AI의 정책 결정을 더 선호한다는 2019년 스페인 IE대학 조사보고서는 브렉시트라는 당시의 이례적 상황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그 상징적 사례임이 틀림없다. 우리 국회는 공공기관 신뢰도 조사마다 만년 꼴찌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예산안 상정을 요구하는 더불어민주당과 행정안전부 경찰국 예산 삭감을 이유로 예산안 상정을 반대하는 국민의힘이 지난 16일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격돌했다. 이만희 행안위 여당 간사와 김교흥 야당 간사 사이 대화가 격해지자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김성룡 기자

행정안전부 예산안 상정을 요구하는 더불어민주당과 행정안전부 경찰국 예산 삭감을 이유로 예산안 상정을 반대하는 국민의힘이 지난 16일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격돌했다. 이만희 행안위 여당 간사와 김교흥 야당 간사 사이 대화가 격해지자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김성룡 기자

정치권이 이태원 참사 수습의 주도권과 방향을 놓고 샅바 싸움으로 요란한 듯하다. 그 연결고리의 정점에 똬리를 틀고 앉은 건 예산 전쟁이다. 민주당은 대통령실 이전과 경찰국 예산을 송두리째 걷어내며 국정조사를 압박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수용 불가를 외치지만 내심 셈법이 복잡하다. 정치권은 내년이면 사실상 총선 채비에 들어간다. 지역구 예산을 얼마나 따냈느냐가 그 정치인의 미래를 좌우한다. 저마다의 절박함 속에 쪽지예산·카톡예산이 또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 조짐이다. 구조를 손대지 않으면 구태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 양태만 달리해갈 뿐. 김진표 국회의장은 최근 제도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쪽지예산 근절의 한계를 토로했다.
AI 정치의 도덕 윤리적, 기술적 한계를 지적하는 반론도 물론 크다. 그러나 예산과 사익의 은밀한 공생 생태계를 교란하지 않으면 AI의 소환을 거부할 명분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차라리 예산만은 AI에게 맡기라”는 크레셴도 식 외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