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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관치 금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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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은 1921년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배상금 1320억 마르크(금)를 갚으라고 통보한다. 당시 독일 정부의 연평균 세입액이 60억~70억 마르크였으니 세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을 꼬박 갚아야 하는 금액이었다.

독일의 재정 상태는 뻔했다. 독일은 즉각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했지만, 어쨌든 매년 배상금은 갚아야 했다. 결국 밤낮으로 돈을 찍어냈다. 독일 통화 공급량은 1921년 이후 2년 만에 7500배 늘었다. ‘1달러=4조 마르크’ 수준까지 물가가 심각하게 뛰었다. 주부들은 나무 대신 돈뭉치를 땔감으로 썼고 아이들은 돈다발을 쌓으며 놀았다. 국가 혈맥인 금융의 붕괴는 곧 국가의 존폐로 이어졌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 얄마르 호러스 그릴리 샤흐트(Hjalmar Horace Greeley Schacht)다. 당시 통화 집행위원이었던 샤흐트는 가치를 잃은 마르크(파피어) 발행을 중단하고 독일 곳곳에 있는 농장·공장 같은 부동산을 담보로 발행하는 저당증권 형태의 새 마르크(렌텐)를 발행했다. 화폐교환 비율은 ‘1=1조’였다. 새 마르크를 받기 위해 수요가 몰렸고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정부·기업·은행 등이 발행 한도를 늘이라고 압박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발행량을 철저히 통제했다. 새 마르크의 품귀 현상은 화폐 가치 회복의 밑거름이 됐고 독일 경제는 회생했다. ‘관치 금융’(정부가 금융시장 인사·자금배분 등에 직접 개입)의 기적이었다.

한국도 관치 금융을 등에 업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빠른 경제성장 신화를 만들었다. 1945년 45달러에 불과했던 국민소득은 60년 만에 2만 달러를 넘었다. 대신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대출 등 금융 활동이 법이나 시장 원리에 의해 투명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각종 비리·청탁·금융 경쟁력 약화 등의 문제가 생겼다.

새 정부 들어 관치 금융 논란이 거세다. 지난 6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취임 이후 금리 산정에서 금융지주 CEO 인선까지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양새라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관치 금융의 기적을 향한 행보일 수 있지만, 정부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던 이전 정권의 ‘관치 망령’이 떠오르는 것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