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뉴스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낯선 땅의 사람들에게 금세 감정 이입이 되죠. 영화를 통해 더이상 ‘먼 나라’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국제 뉴스를 전합니다.
껑충한 청년 마누가 공원 연못 앞에 앉아 백조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뛰어들어 잡습니다. 며칠이나 굶은 그는 백조를 요리해 친구와 먹죠. 제목부터 직설적인 영화 ‘나에게 자유를’(2008) 속 마누는 이라크를 떠나 튀르키예(터키)로 온 쿠르드족입니다.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져 독일로 갈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죠. 왜 떠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굶기 일쑤인 마누가 고향을 탈출하자마자 산 물건이 방독면이거든요.

영화 '나에게 자유를'에는 쿠르드족 청년 마누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백조를 잡아먹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제가 어렸을 때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가스 살포로 다 죽었어요. 독일에 가서 돈을 벌면 고향 사람들에게 다 방독면을 사줄 거예요.”
최근 튀르키예ㆍ이란서 쿠르드족 고강도 압박
지난 13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테러로 6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다쳤습니다. 튀르키예가 쿠르드족에 대한 압박을 더해가고 있던 중 벌어진 일이었죠. 튀르키예 정부는 그 즉시 쿠르드족의 짓이라며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나섰습니다.

지난 7월 이라크 국경지대에서 튀르키예군의 공격으로 쿠르드족 주민들이 사망하자 에르도안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우는 시위가 벌어졌다. AFP=연합뉴스
공교롭게도 14일엔 이란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군 거점에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두 달 전 시작된 반정부 시위를 이들이 지원했다는 게 이유였죠.
인구가 3000만 명이 넘지만 국가를 이뤄본 적 없는 민족, 쿠르드족에 대해선 들어보셨을 겁니다. 튀르키예ㆍ이란ㆍ이라크ㆍ시리아 등에 흩어져 사는 이들의 설움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죠. 그런데 최근 들어 튀르키예와 이란 양쪽에서 탄압의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딱히 사이가 좋지도 않은 두 나라가 쿠르드군을 제거하기 위해 합동 공격을 할 정도입니다. 특히 튀르키예가 눈에 불을 켜고 있죠.

지난 10월 독일 베를린에서 이란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이란의 가혹한 탄압을 규탄했다. AFP=연합뉴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튀르키예-쿠르드족, 피로 점철된 역사
잠시 영화를 다시 볼까요. 마누는 버스에서 쿠르드어로 노래를 부르다 튀르키예 남자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습니다. 왜? 단지 쿠르드어를 썼다는 이유만으로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라크 국경을 넘어왔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인구의 18%를 차지하지만, 둘은 질긴 악연입니다. 튀르키예 정부는 줄곧 이들을 탄압해왔는데 한때는 아예 쿠르드어를 금지했을 정도였죠. 줄곧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닙니다. 중세 시대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튀르키예의 전신)의 지배하에서 “공국의 지위를 누리며 영화로운 시대”(『쿠르드 연대기』에서)를 누렸거든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악연이 시작된 건 100년 전쯤입니다. 제1차 대전이 터지고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며 쿠르드족 역시 격동에 휘말리게 된 겁니다. 때마침 민족주의가 스며들어 독립국의 꿈은 커졌는데,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가 입맛에 맞게 중동 땅을 마음대로 분할해 버렸거든요. 독립은커녕 이라크ㆍ시리아 등으로 더욱 갈가리 찢기게 됩니다. 잠시 아라라트 공화국(1927-30)을 세우긴 했지만 튀르키예의 공격으로 짧은 꿈처럼 사라지고 말았죠.
하필, 튀르키예는 열강 틈에서 어떻게든 강한 민족적 통일성을 지닌 나라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쿠르드족이 거슬렸죠. 갖은 탄압 정책이 동원됐고 ‘인종 청소’라 할 만한 일들도 여러 번 자행됩니다. 그야말로 ‘피로 점철된 역사’였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고요.

지난 2016년 1월 튀르키예군이 이라크 국경 근처 쿠르드족 마을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한 당시 모습. AP=연합뉴스
독재 강화 위해 쿠르드 억압한단 비판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이들이 독립을 꿈꾼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튀르키예는 왜 최근 들어 이들을 더욱 압박할까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욕심 때문이란 것이 외신들의 분석입니다. 뉴욕타임스(NYT)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 위기로 애를 먹고 있는 에르도안이 맹목적 애국주의(jingoism)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고 비판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국민의 눈을 돌릴 ‘적’을 만든 거죠. 처음도 아닙니다. 2019년 6월 튀르키예 최대 도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됐는데요. 그해 10월 에르도안이 쿠르드 조직 거점인 시리아 북동부를 공격한 것을 두고 같은 비판이 나왔었죠.

지난 13일 시리아 쿠르드족이 튀르키예의 쿠르드 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란도 마찬가집니다. 쿠르드족(이란 인구의 10%)이 많이 사는 북서부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이들에게 강경한 것은 아닙니다. 로이터통신은 “이란 정부는 반정부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쿠르드족이 문제’란 식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다”고 분석했죠.
요컨대 독재적 성격을 지닌 튀르키예와 이란 정부가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쿠르드족을 압박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깥 도움은커녕 토사구팽의 연속

미군이 시리아에서 철수하기 며칠 전인 2019년 10월 6일 튀르키예-시리아 국경의 모습. 미군이 철수하자 튀르키예는 곧바로 쿠르드족 거점을 공격했다. AFP=연합뉴스
외부에서도 도움은커녕 토사구팽당한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마누가 가스 살포에 이웃 마을이 당했다고 했잖아요? 1988년에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독가스로 쿠르드족을 공격했는데요. 실컷 쿠르드를 이용해왔던 미국은 이란을 압박하기 위해 후세인이 필요해지자 이를 모른 척합니다.
앞서 말한 2019년 튀르키예 공격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일어난 일입니다. 쿠르드는 미국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조직 이슬람국가(IS)를 토벌하는 데 협력한 1등 공신이었는데요, 미군이 빠지면 튀르키예가 이들을 공격할 걸 뻔히 알면서도 트럼프는 철수를 단행했죠. 이후로 지금까지 튀르키예는 쿠르드 군사 조직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9월 이라크에서 이란 정부를 규탄하며 일어난 시위. 이란에서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잡혀가 사망한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얼굴이 시위의 상징이 됐다. AP=연합뉴스
내부의 분열도 문젭니다. 국제관계 전문가 제라르 샬리앙은 『쿠르드 연대기』에서 “국가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긴 했지만 끊이지 않는 내부 분열 때문에 입장을 통일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같은 ‘민족적 동질성’은 있는데 단일국가를 이뤄본 적도 없고, 지역마다 종교도 다르다 보니 단결이 쉽지 않은 거죠.

쿠르드족의 팍팍한 현실을 그린 영화 '칠판'의 한 장면.
쿠르드족을 다룬 또 다른 영화 ‘칠판'에는 이라크-이란 국경 지대의 메마른 산악지대를 떠돌며 밀수품을 나르는 쿠르드 소년들이 등장합니다. 온통 지뢰밭인 데다 양쪽에서 총을 쏴대는 군인들도 피해야 하죠. 칠판을 등에 메고 ‘가르침 날품팔이’를 하는 선생님이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아이들이 되묻습니다.
“짐을 지고 항상 움직여야 하는데 언제 글을 배워요?"
아무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으니 선생의 칠판은 자꾸 쓰임이 바뀝니다. 노인을 싣는 들것이 됐다가 결혼 지참금이 되는가 하면, 방패가 되죠. 글을 배울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퍽퍽한 삶이 이 '웃픈'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영화 '나에게 자유를' 속 한 장면.
안타까운 것은 이 영화가 나온 게 22년 전인데도 '동네북'인 쿠르드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단 점입니다. 어쩌면 '칠판' 속 아이들의 미래가 '나에게 자유를'의 마누일지도요. 마누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꿈에 그리던 독일에 도착합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끝은 가슴이 시리죠. 그가 앞으로 마주할 현실 역시 녹록지 않을 것임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에게 자유를(For A Moment, Freedom)'은 쿠르드족 출신 이란 감독 아라쉬 T. 리아히가 자신이 겪은 일을 바탕으로 2008년 내놓은 영화다. 이란, 이라크 등에서 국경을 넘어 터키로 향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경쟁 금상을 받았다.
'칠판(Blackboards)'은 이란 감독 사미라 마흐말바프가 2000년 발표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영화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지대를 오가며 고된 삶을 사는 쿠르드족의 모습을 담았다. 사미라는 이란 유명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딸이다.
점점 좁아지는 입지...무장조직 합류 늘어
지난 13일 이스탄불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튀르키예 정부는 쿠르드노동자당(PKK)을 배후로 지목했다. 가디언은 "PKK는 이번 테러와 관련이 없다며 부인했지만, 튀르키예의 압박은 더 강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튀르키예 측은 올 초부터 쿠르드족이 주축인 시리아민주군(SDF)을 잡겠다며 시리아 북부를 폭격해 왔다. 지난 8월 공격에선 민간인들이 숨지기도 했다.
이란에서도 특히 쿠르드족을 겨냥한 탄압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선 지난 9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단 이유로 끌려간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란 정부는 시위 초반 이라크 북부 이란쿠르드민주당(KDPI)의 거점에 미사일을 쏜 데 이어 지난 14일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국제사회에서 쿠르드족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스웨덴과 핀란드가 튀르키예 정부와 쿠르드족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진행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마음이 급해진 이들 국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가입을 위해 회원국인 튀르키예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중립국 스웨덴과 핀란드는 쿠르드족 망명자들의 은신처로 꼽혔던 곳이다.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난민이 되거나 무장조직에 합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 10월 CNN은 이란 시위를 보도하며 “탄압을 이기지 못해 무장조직에 합류하는 쿠르드족이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