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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안 된 ‘노인공화국’] 소득 없어 ‘늦깎이 취준’ 나서는 고령자들…대부분 불안정한 비정규직·알바로 내몰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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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09면

SPECIAL REPORT 

6월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채용박람회를 찾은 어르신들이 구직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뉴시스]

6월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채용박람회를 찾은 어르신들이 구직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뉴시스]

고작 6개월. 한평생 ‘강 과장’ ‘강 부장’으로 살았던 강한성(58·가명)씨가 편의점 야간 알바생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대기업에서 30년간 근무한 강씨는 오랜 직장생활에 지쳐 지난 2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구체적인 은퇴 후 계획은 없었지만, 직장 내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버텨낼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은퇴가 가져다준 행복도 잠시에 불과했다. 은퇴 후 6개월이 지나 실업급여 수급이 중단되자마자 수입이 ‘0원’이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강씨는 “퇴직금으로 남은 빚을 갚고 나니 통장 잔액이 바닥났는데, 연금을 받기까지는 아직도 7년 가까이 남았다”며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어떻게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고 전했다. 시니어 취업 박람회, 직업소개소 등을 전전하던 그는 결국 지난 8월부터 집 근처 편의점에서 모두가 꺼리는 야간 시간대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강씨는 “평생을 화이트칼라(사무직 근로자)로만 일하다가 밑바닥의 인생을 체험하고 있다”라며 “수십 명의 팀원을 이끌며 인정받던 내가 진상 손님을 상대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하루하루가 괴롭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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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늦깎이 취준생(취업준비생)’이 되는 건 강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년퇴직을 맞이해 노동현장을 떠난 50·60세대는 생애 첫 취업을 꿈꾸는 청년들만큼이나 애타게 일자리를 찾고 있다. 이들이 은퇴 후에도 일자리를 찾는 이유는 직장에서 은퇴한 후 국민연금을 수령할 때까지 수입이 사라지는 ‘소득 크레바스’ 때문이다. 직장인 평균 은퇴 연령인 50대 중반에 은퇴를 맞이하면 65세에 연금을 받을 때까지 5~10년 정도의 공백이 발생하는데, 수십년간 유지됐던 소득이 갑작스레 사라지니 생계에 급격한 위협을 직면하게 된다. 김윤영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은 “명목적 은퇴 연령과 실질 은퇴 연령 사이의 소득 공백이 은퇴자들에겐 가장 큰 부담이자 고통”이라며 “희망퇴직, 연금 개시 연령 상향 등으로 소득 크레바스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산은 줄어들기 마련이고, 특히 주된 일자리에서 자산을 축적하지 못한 저소득 노인일수록 타격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하지만 이들이 65세가 지나 연금을 수령하게 돼도 삶의 질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현재 지급되는 공적·사적 연금만으로는 윤택한 노후 생활을 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5월 기준 55~79세 연금수령대상자가 수령하는 월평균 연금액은 공적·사적 연금을 합쳐 2인 기준 138만원이다. 통계청이 조사한 은퇴 후 최소 생활비 기준인 월 216만원의 절반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2인 가족 법정 최저생계비인 196만원조차 보장받지 못하니 연금을 수령해도 일을 놓을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지난 2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연금을 받으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고령 인구(55~79세)는 370만3000명으로, 5년 전과 비교해 46.7% 늘어났다.

문제는 이들이 생계를 위해 노동현장에 다시 발을 들여도 일할 자리가 없다는 점이다. 강씨처럼 은퇴 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젊은 세대조차 취업이 어려운 요즘 고령자에게 매력적인 일자리가 그냥 주어질 리 없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퇴직금 등을 모아 창업 전선에 뛰어들기도 하지만 무한 경쟁의 자영업 시장에서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결국 이들의 발걸음은 불안정한 일자리로 향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 806만6000명 중 29.7%(240만3000명)가 60세 이상 고령 노동자다. 하지만 노동현장에서도 젊은 세대에 치여 당연한 권리조차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노인 노동자 중 67.6%는 유급휴가를 받지 못했으며, 53.6%는 퇴직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윤영 연구위원은 “최저임금, 고용보험 등 노동자로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는 상황”이라며 “하지만 일반 근로자와 다르게 노동조합 등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여건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아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몸담은 회사에서도, 다시 내던져진 사회에서도 외면받는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정년퇴직 후 3년간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이영철(68)씨는 “퇴직 전부터 은퇴교육도 받아봤지만, 막상 퇴직하고 보니 전혀 다른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아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몸은 건강한데 나를 불러주는 곳은 없고, 가족들은 부양해야 하니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한동안 건강한 몸조차 원망스러울 정도로 극심한 허탈감을 느꼈다고 한다.

은퇴 후에도 일하는 것이 당연해질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갑작스레 맞이하는 소득 크레바스가 빈곤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연착륙을 도와줄 대책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고령자 일자리 정책과 관련해 단순히 은퇴 후 생계유지를 위한 소득 창출 관점보다는 직업을 통한 사회활동이 노년층에게는 지속 가능한 사회보장제도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고령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젊은 세대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회이자, 고령자에게는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은석 한국고용정보원 고령사회연구팀장은 “고령 취업희망자들이 원하는 것은 높은 임금이나 직위보다도 내가 사회 내에서 쓸모 있음을 인정받는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생계유지의 관점에서 고령자들의 일자리를 지원해왔다면 이제는 노후 삶의 질을 향상하는 측면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50·60세대가 수십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은퇴 후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경력과 연계된 일자리를 확보해줄 필요가 있다.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고령층에게는 세금을 투입해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공공일자리라도 필요하겠지만, 중산층 이상의 고령자에게는 경력을 살리는 것이 본인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이득이다. 정년을 넘긴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에 지원금을 지급하는 고령자 계속고용장려금 등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일자리의 질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 고용·사회정책본부장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기업 격차가 커지는 상황에서 변화하는 노동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우선되어야 한다”며 “임금체계 개편 등 기업이 고령층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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