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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안 된 ‘노인공화국’] ATM·모바일 앱 낯설고 어려워, 1.5㎞ 걸어 은행 방문해 송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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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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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일 서울 종로구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노인들이 서울시와 대한어머니회가 주관한 키오스크 교육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월 17일 서울 종로구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노인들이 서울시와 대한어머니회가 주관한 키오스크 교육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돈 보낼 곳이 있는데 내가 했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째. 몸이 불편하더라도 와야지요” 지난 8일 서울 도봉구에 거주하고 있는 박모(73)씨는 송금을 위해 은행을 찾았다. 송금은 자동화기기(ATM) 또는 모바일 앱으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씨에게는 어렵고 낯선 방법이다. 자칫 실수로 아껴서 모은 돈을 날릴까 두렵다. 지난 4월 집 근처 지점이 사라진 이후 가까운 영업지점인 이곳까지 1.5㎞를 더 걸어야 함에도 직접 방문한 이유다.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역에서는 김모(77)씨가 스마트 지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길을 몰라 난처해 보였다. 똑똑하다는 기계 앞에서 배낭을 메고 꼿꼿이 서 있는 그의 정정함은 무색해졌다. 기자가 행선지를 물으며 지도를 확대하자 김씨는 “이렇게 손으로 만지면 커지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스마트 지도는 손으로 화면을 만져 확대·축소, 길 찾기 등을 할 수 있는 지도다. 김씨는 스마트폰 사용자였지만 기기 화면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도, 이용법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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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회에서 고령층이 소외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적응 속도보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KAIST 고령사회 기술복지 정책연구실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최문정 교수는 “고령자에게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는 마치 한국어만 쓸 수 있는 사람이 해외 이민을 간 것처럼 굉장히 적응하기 어려운 사회”라고 평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특히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일상에서의 비대면·무인시스템이 확대돼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점차 커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일반국민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을 100%으로 산정했을 때 지난해 고령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69.1%에 그쳤다. 이는 4대 정보취약계층(장애인, 저소득층, 농어민, 고령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치였다.

고령일수록 격차는 심화됐다. 50대부터 97%로 평균치(100%)에 못 미쳤다. 60대는 77.1%, 70대 이상은 46.6%로 연령대가 바뀔 때마다 20%포인트씩 떨어졌다.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모바일 기반 유무선 융합 디지털 환경에서 발생하는 정보격차의 수준 및 특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유무선 기기의 보유 여부, 인터넷 상시 접속가능 유무, 모바일 기기 이용능력 등을 측정한다.

격차는 스마트폰 보유율에서부터 벌어졌다. 지난해 기준 고령층의 모바일 스마트 기기 보유율은 81.5%로 일반국민(93.5%)보다 12%P 더 낮았다. 또한 고령층의 15%는 아직도 스마트폰이 아닌 피쳐폰(일반 휴대전화)을 사용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더라도 잘 활용하지 못한다. 기본 환경설정, 무선 네트워크 연결, 파일 전송을 할 수 있는지 등 7개 항목을 평가한 결과 고령층의 모바일 기기 이용 능력은 46%에 불과했다. 일반국민 평균(71.1%)보다 한참 모자랐다.

문제는 기기 활용 정도가 모바일 서비스 접근성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서울시민 디지털역량실태조사에 따르면 55세 이상 고령층의 ‘상품 구매’ ‘배달 주문’ ‘결제’ 능력은 55세 미만 성인의 절반 수준이었다. 일상에 편리함을 가져다준 배달, 택시 호출 등의 모바일 서비스에서 고령층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20·30대는 72.8%가 앱으로 택시를 부르지만, 60대 택시앱 사용자는 34.8%에 불과했다. 젊은이들은 택시를 부르고 시간에 맞춰 나가 타지만 고령층은 3명 중 2명 꼴로 추우나 더우나 거리에서 10~20분씩 택시를 기다리는 셈이다.

최근 식당과 카페에 즐비해진 무인 단말기(키오스크)도 이들에겐 두려운 존재다. 음료 한 잔을 주문할 때도 단계가 많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오전 서울시립강북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13회차 키오스크 교육 현장을 찾았다. 능숙하게 메뉴를 선택한 한현숙(71)씨는 이어서 등장한 또 다른 선택창에 당황해했다. 권지은 강사가 “햄버거를 고르고 단품, 기본 세트, 세트에 간식이 하나 더 있는 것 중 선택해야 한다”고 설명하자 지켜보던 다른 수강생들도 덩달아 “여기가 어렵더라”며 더욱 집중했다. 한 수강생은 “지난주에 카페에서 도전했는데 버벅거려서 그냥 돈 주고 사 먹었다”고 말했다.

인건비 절감 및 편의성으로 인해 향후 키오스크는 더 보편화할 전망이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에 따르면 민간에 설치된 키오스크는 2019년 8587대에서 지난해 2만6574대로 3배 이상 늘었다. 공공시설 키오스크도 2000대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아직 키오스크를 모르는 고령층이 상당수다. 조현숙(76) 대한어머니회 키오스크 교육 활동가는 “지금은 사용법을 알려줄 정도로 능숙하지만, 교육을 받기 전에는 키오스크가 뭔지 몰랐다”며 “지금 서울시 지원으로 교육받는 분들 중에서도 키오스크를 모르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디지털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방법으로는 ‘교육’이 손꼽힌다. 서울디지털재단에 따르면 만 55세 이상 서울시민의 54.2%는 키오스크를 사용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다. 사용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사용 방법을 모르거나 어려워서(33.8%)’였다. 교육을 받은 어르신들은 비록 미숙하더라도 상당한 자신감을 표했다. 강북노인복지관의 키오스크 교육 수강생 김영하(71)씨는 “아직 어렵지만 기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인선(66) 대한어머니회 활동가는 “키오스크라는 말도 몰랐던 제가 지금은 친구들 것까지 계산해줄 정도로 능숙해진 것처럼, 반복해서 연습하면 고령층도 충분히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교육은 ‘모두가 배울 수 있다’는 전제에서만 유효한 방안이다. 교육만으로는 격차를 좁힐 수 없다. 최문정 교수는 “국가에서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있지만 배울 수 없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결국 100% 디지털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소수라도 중요한 기능은 아날로그적인 휴먼 서비스가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오스크가 인력을 대체하기 위한 기기일지라도, 디지털 취약계층을 도울 최소한의 인력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은 이제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잔여 백신 조회, QR 인증, 재난 경보 등 생활 필수 기능이 디지털을 중심으로 전파되며 디지털 이용 능력이 생존 문제와 직결되기 시작했다. 글씨 크기를 키우고, 쉬운 말을 사용하고, 사용자 환경(UI)을 최대한 단순화하는 등 고령층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울 내 31개 지점에 설치된 신한은행의 ‘시니어 맞춤 ATM’ 등 고령층을 위한 키오스크가 이미 상용화된 사례도 있다. 그들을 위한 지금의 배려에 미래 우리의 생존이 달려있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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