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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는 농부 마음 가져야” 박충흠, 농사 지어 자급자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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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조각가 박충흠은 뇌프셸에서 “조각가는 농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스승 김종영 교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현재 그는 제주도에서 조각가의 삶을 살고 있다. [사진 박충흠]

조각가 박충흠은 뇌프셸에서 “조각가는 농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스승 김종영 교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현재 그는 제주도에서 조각가의 삶을 살고 있다. [사진 박충흠]

그곳은 뇌프셸,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70㎞ 떨어진 시골. 멀리서 자작나무 이파리가 흔들렸다. 소낙비가 지나간 잎사귀에서 영롱한 빛이 떨어졌다. 비에 젖은 청년은 30분을 엎드려 울었다.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조각가로 뽐내며 살아온 지나간 세월이 무상하게 느껴졌다. ‘경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청년은 지나온 시간을 더듬었다. 조각가 박충흠(1946~ )은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이 났다. 1·4 후퇴를 할 때는 여섯 살이었다. 그의 부친은 전쟁이 나기 전에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남북분단이 되어버렸다. 박충흠의 큰 형이 서울의 경기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박충흠이 여섯 살 때 가족은 남행을 결행했다. 엿을 고아 비상식을 마련했다. 남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월남 피난민을 태우는 배가 귀했다. 다른 피난민이 마련해 놓은 배에 억지로 어머니와 다섯 남매가 몸을 밀어 넣었다. 배는 연백에서 가까운 교동도를 향했다. 지척이 만리 같았다. 겨우 교동도를 거쳐 강화도에서 봇짐을 풀었다. 엿과 최소한의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며칠을 보내었다. 어느 날 누이가 말했다. 어둠의 저편에서 우리를 찾는데 아무래도 아버지 목소리 같다고. 강화도에 아버지가 나타날 리가 없다고 했는데, 과연 아버지였다. 먼 가족이 남하했다는 소식을 어찌 알았던지 부산에서 강화도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서울예고 가고 싶어 교장에 편지 써

왼쪽부터 박충흠, 송유라, 아들 영하. 뇌프셸, 1980년. [사진 박충흠]

왼쪽부터 박충흠, 송유라, 아들 영하. 뇌프셸, 1980년. [사진 박충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대신동의 방 하나에 아버지 삼촌, 형 셋이 살고 있었다. 부친과 삼촌은 양초를 만들어 국제시장에 내다 팔고 있었다. 다시 합쳐진 가족은 대신동에서 터를 잡았다. 1953년 박충흠은 동대문초등학교 분교에 입학했다. 전쟁 중인데도 미술대회가 열렸다. 서울예고의 전신인 이화예고에서 주최한 대회였다. 박충흠의 집에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커다란 스웨덴 병원선이 등을 켜고 밤바다를 환하게 비추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걸 그렸다. 1등이었다. 상품은 일제 사쿠라 크레파스. 이화예고 누나들이 어린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넌 그림을 잘 그리니 나중에 꼭 우리 학교로 들어와!”

그해 가을 환도를 했다. 왕십리에 있는 무학국민학교를 다녔다. 박충흠은 그림 그리기가 즐거웠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인문계 고교가 아닌 서울예고를 가고 싶었다. 서울예고 임원식 교장에게 입시 요강에 관한 질문의 편지를 썼더니 친절한 답장이 돌아왔다.

서울예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수석 입학생은 등록금이 면제되고 부상으로 여학생용 감색 구레빠(크래버넷) 옷감이 주어졌다. 수석합격은 당연히 여학생이 될 줄 알고 여학생용 옷감을 준비했던 것. 남학생은 연주복처럼 생긴 검정색 교복이었다. 박충흠은 감색 옷감을 왕십리의 양복점에 가져가서 교복을 맞추었다. 입학식 때 보니 혼자만 감색이었다. 동기생 이두식(화가) 등은 모두 검정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문제가 될 줄 알았는데 임원식 교장은 학교 측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으니 그냥 감색 교복을 입고 다니라 했다. 이듬해에 신성희(화가), 송창식(가수) 등이 입학했다. 한동안 검은색, 감색 두 가지 교복이 혼재했는데, 감색 교복이 아무래도 더 세련돼 보였다. 서울예고 교복은 결국 감색으로 통일되고 말았다.

1학년 때 담임은 화가 문미애였다. “얘야, 넌 그림을 잘 그리니 나중에 꼭 우리 학교로 들어와!” 하던 누나 중의 한 명이었다. 최만린, 백문기 등이 서울예고에 와서 조각을 가르쳤다. 박충흠은 서울미대를 조소 전공으로 입학했다.

무제, 봄 미술관, 제주. [사진 박충흠]

무제, 봄 미술관, 제주. [사진 박충흠]

조소과의 김종영(1915~1982) 교수는 조각가는 농부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농부와 조각가, 이 둘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 뜻을 몰랐다. 스승인 김종영의 집에 자주 갔다. 마산, 창원 사람들이 하듯 겨울철에 꾸덕꾸덕하게 말린 대구를 칼로 베어내어 먹는 걸 처음 보았다. 생선탕이 맛있었다. 사모님이 하신 요리이지만 그 음식을 가르친 건 본인이라고 김종영의 어머니 의령 할머니가 슬쩍 자랑했다.

20대 후반, 동년배의 작가들이 국전에 입상을 노리던 나이에 박충흠은 이미 국전 추천작가가 되어 있었다. 일찍 동덕여대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도 뭔가 모자라고 허전했다. 1977년 학교를 휴직하고 자신의 12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파리로 유학길에 올랐다. 교수에서 도로 미술학교 학생이 되었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가 세자르(1921~1998)로부터 진정한 너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당황했다. 그동안 어디서 본 듯한 작품만을 해왔다는 걸 박충흠 본인이 먼저 알고 있었다.

1년간 시골 뇌프셸에 가서 살았다. 파리에서 가는 2량짜리 기차가 하루 6차례 있었다. 30가구가 사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청년들은 다 대처로 나가고 노인들만 남겨진 마을에 박충흠, 송유라 부부와 2살배기 아들이 나타나자 갑자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 부부가 신기했다. 하루종일 헛간에서 뭘 두드리고 있는 박충흠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마을 노인들이 호박, 과일 등 먹거리를 박충흠 부부의 문 앞에 놓고 갔다. 마을에는 오래된 뇌프셸 성당이 있었다. 아들 영하는 이 성당을 깡메성당이라고 불렀다. 깡 깡 깡 종이 울린다 해서 깡, 음메 하고 소가 운다고 해서 메, 그리하여 깡메가 되었다.

그 마을에는 식료품 가게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트럭이 와서 먹거리 등 생필품을 팔았다. 박충흠은 아예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기로 했다. 시커먼 흙이 매우 비옥했다. 손을 베여가며 억센 쐐기풀을 다 뽑아내고 고랑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보내온 씨앗으로 무, 배추, 감자, 호박 등을 심었다. 어릴 때 왕십리 배추밭 근처에서 자라며 농사일을 본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자그마한 씨앗에서 떡잎이 돋아나서 큰 배추로 자라나는 모습이 신기했다. 솎은 배추로는 겉절이를 하거나 된장국에 넣어 먹었다. 중학 동창 정기용(건축가 1945~2011)이 오면 수확물을 주었다.

탄광 연못서 붕어 잡아 조림 요리

왼쪽부터 송유라, 한용진, 김향안, 문미애, 박충흠, 아들 영하. 뉴욕 환기재단 . [사진 박충흠]

왼쪽부터 송유라, 한용진, 김향안, 문미애, 박충흠, 아들 영하. 뉴욕 환기재단 . [사진 박충흠]

노지 탄광이 있었다. 석탄을 파고 난 자리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되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쓰인 낚싯대를 사다가 구더기를 끼웠다. 손바닥만 한 붕어가 잘 잡혔다. 고추장을 넣고 붕어조림을 만드니 맛이 그만이었다. 오전에는 농부, 오후에는 어부가 되는 기막힌 생활을 누렸다.

농사를 짓다 보니, 배추씨 안에 배추가 숨어 있고 무씨 안에 무가 숨어 있어 배추와 무를 땅 위로 길어 올리는 농사가 새롭게 뭔가를 억지로 만들려는 조각보다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품의 창작은 다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가는 농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스승의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소년 박충흠은 신앙심이 깊었다. 성당에서 복사를 했다. 새벽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신당동의 신당천주교회를 갔다가 돌아와서 왕십리의 무학국민학교로 등교할 정도였다. 뇌프셸에서 큰비를 맞고 엉엉 울고 난 이후 박충흠의 내면 깊은 곳에 웅크려 있던 대자연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위대한 존재에 대해 승복을 하고 나니 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 나뭇잎 하나,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조각이 바뀌었다. 잘 만들겠다는 그동안의 생각이 오만이었다.

가을걷이로 농사일은 끝났다. 파리로 나갔다. 정기용의 아틀리에는 설탕공장 자리였다. 이 작업실의 반을 빌어 작업했다. 점토를 빚어보니 거추장스럽지 않은 둥글둥글한 작업이 나왔다. 동판을 잘라서 용접으로 붙이는 작업은 미술학교에서 했다.

귀국해서는 동덕여대에 복직했고 곧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다. 일찍 학교를 나와 전업 작가가 되었다. 지금은 제주도에 가서 농부의 마음으로 조각하고 산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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