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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령 시대 생긴 비밀 공간, 현대인에게 ‘정서적 쉼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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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26면

POLITE SOCIETY

뉴욕 지하철 입구의 반지하층 구석에 위치한 바. [사진 박진배]

뉴욕 지하철 입구의 반지하층 구석에 위치한 바. [사진 박진배]

뉴욕 유학 시절 알고 지냈던 미국 친구 요하네스(Johannes Knoops)와 2007년 뉴욕 주립 패션 공과대학(FIT)에 동시에 임용됐다. 졸업 후 20년이 지난 후라 무척 반가웠고, 무엇보다 같은 학과에 친구가 동료 교수로 있다는 사실이 여러모로 든든했다. 뉴욕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자란 그는 뉴욕 건축과 문화예술의 전문가다. 뉴욕에 관련된 어떤 질문에도 그 역사와 스토리를 명쾌하게 알려준다. 어느 날 그에게 “맨해튼 어딘가 아주 허름한 구멍가게가 있는데, 그 안에 ‘직원외 출입금지’ 표시가 붙은 문을 열고 계단을 통하면 완전히 다른 고급 레스토랑이 나온다더라. 혹시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가 되물었다. “그 레스토랑, 계단을 올라가서 있다고 하더냐?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고 하더냐?” 그리곤 두 장소 모두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뉴욕 ‘21 클럽’ 90년간 자리 지켜

이런 숨겨진 장소들, 흔히 ‘스피크이지(Speakeasy)’라고 불리는 공간들이 세계적으로 유행이다. 런던, 뉴욕, 도쿄, 서울 등 웬만한 도시에 몇 군데씩 유명한 곳들이 있고 트렌드에 민감한 현지인과 방문객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스피크이지는 금주령 시기인 1920~1930년대 탄생한 미국의 문화다. 단속을 피해서 몰래 술을 팔고 마시던 장소를 뜻한다. 1823년 영국의 ‘밀수상점(Speak Softly Shop)’에서 파생된 단어로, 출입을 위한 암호를 조용히 말하고 그 소리마저 건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소곤거리는데서 유래했다. 술은 ‘소스’ ‘주스’ ‘독약’ 등으로 불렸고, 출입을 위한 암호들도 ‘일요일 예배’ ‘후추 맛’ ‘오래된 포도’ ‘아빠가 집에 있다’ 등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았다.

금주령 당시 미국 전역에 수만 군데가 성업을 했고 기업인, 언론인, 영화배우, 정치인, 심지어는 단속의 주체인 경찰들까지 신분에 상관없이 어울리던 장소였다. 대표적인 곳은 뉴욕의 ‘21 클럽’으로 1930년 1월 1일 비밀 영업으로 시작, 2020년 문을 닫기까지 90년간 자리를 지켰다. 직원이었던 프랭크 부캐넌(Frank Buchanan)이 설계를 맡아 계산기 핸들을 당기면 벽이 회전하며 등장하는 바, 위장문, 비상시 술병을 던져 없애버리는 작은 터널, 옆 건물 지하의 비밀 와인창고 등 단속을 대비한 각종 장치를 구비해 놓았었다(‘21 클럽’은 뉴욕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손님에게 넥타이와 자켓의 착용을 요구했던 레스토랑이다. 입지 않은 신사들에게는 자켓을 빌려주었는데 랄프 로렌 등 고급 브랜드였던 걸로도 유명했다).

스코틀랜드 키쓰 마을의 ‘세븐 스틸즈’ 레스토랑. 책장 문을 열면 비밀 바 공간이 등장한다. [사진 박진배]

스코틀랜드 키쓰 마을의 ‘세븐 스틸즈’ 레스토랑. 책장 문을 열면 비밀 바 공간이 등장한다. [사진 박진배]

스피크이지를 모방한 공간의 연출은 금주령 해제 이후에도 하나의 테마로 유지돼 왔다. 입구를 찾기 힘들고,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으며, 간판이 아예 없거나 예전의 영업상호를 그대로 사용해서 폐업한 것처럼 보이는 장소들이 그 예다. 영화 007 시리즈 등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비밀의 문이나 바도 그런 맥락 중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스피크이지 장소들은 더욱 기발한 방법으로 공간의 접근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입구의 작은 철물점이나 상점 뒤편의 숨은 통로로 들어서면 등장하는 술집 등이다. 몇 해 전 개관한 뉴욕 랭함(Langham) 호텔의 비밀 루프탑 역시 진입 방식이 독특하다. 어렵게 예약에 성공했다면, 호텔 안내데스크에 와서 1101호 객실의 열쇠를 받아야 한다. 문을 열고 그 객실을 통과하면 노천의 테라스로 진입하게 된다. 이외에도 지하철 입구의 반지하층 구석에 위치한 바, 갤러리 뒤편 그림 속에 숨어 있는 레스토랑, 이전에 방문했던 손님의 추천으로만 예약할 수 있고 정육점 뒤편의 비밀통로를 통하는 일식당 ‘보헤미안(Bohemian)’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런 작은 공간, 그리고 이런 여러 종류의 공간들이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작동할 때 도시의 밤은 지극한 매혹으로 다가온다.

이런 장소의 마술은 무엇보다 폐쇄성이다. 나만의 아지트 같은, 그래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느낌이다. 다 아는 장소에 가서 노는 건 누구나 아는 브랜드를 착용한 것만큼이나 지루하다. 개성을 넘어 약간의 배타성마저 가미된 ‘나만의 것’ ‘나만의 곳’ ‘나만의 비밀’이 돼야 한다. 이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노출돼 있지 않은 장소를 찾아가는 기대와 흥분으로 시작된다. 이 과정이 전체 경험의 절반이다. 다음은 ‘엔트리 메시지(Entry Message)’, 즉 첫인상이다. 엔트리 메시지는 레스토랑이나 패션부티크와 같은 상업공간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전략이다. 이런 과정을 통과해서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와!”하는 놀람이 있어야 한다. 엔트리 메시지에는 특별함이 있어야 하고 소셜미디어에 올릴만한 시각적 요소가 보여야 한다.

뉴욕 ‘열쇠와 힐’ 스피크이지 바. 철물점 외관을 갖추고 있다. [사진 박진배]

뉴욕 ‘열쇠와 힐’ 스피크이지 바. 철물점 외관을 갖추고 있다. [사진 박진배]

입장하는 재미는 일회성 경험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그 안에서 제공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질 역시 중요하다. 한국인 최초로 미쉐린 스타를 받은 셰프 후니 김은 최근 뉴욕에 반찬가게를 열었다. 인공재료를 시용하지 않고 천연발효한 장을 기본으로 만드는 건강반찬이다. 그 반찬가게 구석의 비밀통로에는 침향을 피워 놓았고, 천장에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복도 끝의 문을 열면 고급 한식당 ‘메주(Meju)’가 등장한다. 아주 신비로운 시각적, 후각적 엔트리 메시지다. 물론 음식도 최고 수준이다.

스피크이지 장소에 관한 예의는 우선 위치를 노출하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 단속을 피할 필요는 없지만 가게가 광고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만큼, 소문을 내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나 와서 물이 흐려지면 손님은 떠난다. 이런 공간을 꾸미는 이유는 대부분 비밀스러움을 테마로 고객을 유혹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현실적인 이유로 대도시의 비싼 월세가 한 몫을 한다. 바의 특정상 저녁 이후부터 새벽까지 영업시간이 제한되지만 월세는 고정비이므로, 그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서 낮에도 영업할 수 있는 커피숍, 구멍가게, 철물점 등을 갖추고 공간을 시간대별로 나누어서 영업을 하는 것이다.

몰래 숨어서 음주하는 느낌 연출

뉴욕 ‘열쇠와 힐’ 내부. 금주령시대로 돌아가서 몰래 음주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으로 빈티지 인테리어를 재현해 놓았다. [사진 박진배]

뉴욕 ‘열쇠와 힐’ 내부. 금주령시대로 돌아가서 몰래 음주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으로 빈티지 인테리어를 재현해 놓았다. [사진 박진배]

이런 공간을 만든 사람에 대한 감사와 그 장소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 역시 중요하다. 모자를 벗어야 하고 운동복 차림은 불허하는 등의 드레스코드가 있는 곳, 사진 촬영을 허용하지 않는 곳, 큰소리로 떠들거나 고함을 치는 것, 자기소개를 하는 등 다른 손님에게 말 거는 걸 허용하지 않는 장소 등 나름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다.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은 나름의 사회적 모임이다. 그래서 다른 손님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중요하다. 이곳은 배타성과 은닉성을 즐기기 위해서 온 사람들의 공간이므로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인정함이 중요하다.

1930년 비밀 영업으로 시작해 90년간 자리를 지켜온 뉴욕 ‘21 클럽’ 외부의 경마 자키동상 모습으로, 유명한 엔트리 메시지다. [사진 박진배]

1930년 비밀 영업으로 시작해 90년간 자리를 지켜온 뉴욕 ‘21 클럽’ 외부의 경마 자키동상 모습으로, 유명한 엔트리 메시지다. [사진 박진배]

스피크이지 공간은 금주령 시대로 돌아가서 몰래 음주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의 연출이 중요하다. 그래서 당시 분위기의 빈티지 인테리어를 재현하는 경우가 많다. 1920~1930년대 스타일이었던 아르데코(Art Deco)가 주를 이루는 이유다. 리차드 기어 주연의 ‘코튼 클럽(The Cotton Club)’과 같은 영화에서 보이듯이 아르데코는 공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스피크이지 공간에서는 공연이 함께 이루어진다. 몰래 술을 먹는 것 이상의 뭔가 특별한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1957년 뮤지컬 영화 ‘파자마 게임(The Pajama Game)’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에르난도즈 하이드어웨이(Hernando’s Hideaway)’는 1920년대 시카고의 스피크이지 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됐으며,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하우스에서 단골로 연주되는 곡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거나 탈출하기 위한 현대인의 마음 한가운데 스피크이지라는 엔트리 메시지가 하나의 포털(portal)이 되고 있다. 허접한 공간을 통과한 후에 느끼는 환희, 그리고 그 비밀의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의 짜릿함, 이건 디지털 세계에서 맛볼 수 없는 물성과 감성의 종합세트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으로 닫혀있는 비밀의 장소, 그리고 심리적으로 외부세계와 차단할 수 있는 고립된 공간이 제공하는 특별한 정서를 원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숨겨진 장소에서 공연되는 슬픈 탱고처럼….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연세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공부했다. OB 씨그램 스쿨과 뉴욕의 도쿄 스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공간미식가』, 『천 번의 아침식사』 등을 쓰고, 서울의 ‘르 클럽 드 뱅’, ‘민가다헌’을 디자인했다. 뉴욕에서 ‘프레임 카페’와 한식 비스트로 ‘곳간’을 창업,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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