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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속 와인잔, 부유함·유혹의 상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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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22면

와글와글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 ‘신사와 와인 마시는 여인’(1660)에서 와인 잔은 유혹과 부유함의 메타포로 묘사돼 있다. [사진 베를린 국립회화관]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 ‘신사와 와인 마시는 여인’(1660)에서 와인 잔은 유혹과 부유함의 메타포로 묘사돼 있다. [사진 베를린 국립회화관]

히딩크, 하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반 고흐,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을까? 와인과 인연 많은 네덜란드인이다. 한국 월드컵 축구의 영웅 히딩크 감독이 샤토 탈보(Talbot)를 즐겨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때 국내에서 이 와인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멜은 1653년 8월 태풍으로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출동한 관헌들에게 검붉은색 포도주를 줌으로써 한반도에 최초로 와인을 선물한 서양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비운의 천재 화가 반 고흐는 가난했던 파리 시절 싸구려 레드 와인을 너무 마셔 위장을 버리고 치아가 상했다는 편지를 동생 테오에게 전했다.

하멜, 한반도에 포도주 처음 들여와

화가 페르디난드 볼의 ‘암스테르담 와인 상인회 지도부’ 단체 초상화(1663). [사진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화가 페르디난드 볼의 ‘암스테르담 와인 상인회 지도부’ 단체 초상화(1663). [사진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와인과 네덜란드, 얼핏 형용모순처럼 들리지만 네덜란드와 와인의 인연은 깊다. 로마 제국 점령 시절부터 와인 문화를 접했고, 현재도 작은 단위이기는 하지만 약 170개 포도농원에서 연간 100만 병의 포도주(3분의 2는 화이트 와인)를 생산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덜란드는 오랫동안 주변 벨기에, 덴마크처럼 와인보다는 맥주에 친숙한 나라였다. 근세 이전까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물을 마시는 것보다 양조된 맥주가 훨씬 안전했기에 액체 음식의 한 종류로 여겨왔다. 기록에 남아있는 통계에 따르면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는 250~300ℓ, 게다가 저알콜 맥주는 아동에게 적합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맥주는 네덜란드의 일상 음료였다. 현재도 하이네켄, 암스텔 맥주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황금의 세기라는 17세기로 접어들면서 극적인 전환점이 시작된다. 특히 상인과 부유한 시민 층을 중심으로 와인은 일상 음료로 점차 자리 잡게 되는데 풍속화라는 장르를 통해 그 모습을 남긴 대가가 바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였다. 그는 조선에 왔던 하멜과 불과 2년 아래의 동시대 인물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델프트 풍경’ 등의 명작을 남겼으며 렘브란트와 더불어 네덜란드 황금의 17세기를 빛낸 거장이었다. 약 35점의 작품만 남겼을 정도로 과작의 화가였지만 그 가운데 와인과 관련된 세 점의 인상적 작품을 남겼다.

첫 번째는 일명 ‘뚜쟁이’(The Procuress, 1656년 작, 독일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 소장)이라는 작품으로 밝은 노란색 옷을 입은 창녀와 그녀의 가슴을 슬쩍 만지면서 여자의 손에 은전을 쥐어주는 남자, 이 남자와 창녀의 묘한 거래를 이어주는 나이 든 뚜쟁이 여자, 그리고 화면 좌측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등 모두 4명이 등장한다. 화면의 빛을 받는 젊은 창녀는 두 뺨에 홍조를 띠고 있고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다. 그 옆으로 델프트 자기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에 뛰어난 장인의 정물화 솜씨도 확인하게 된다.

페르메이르의 또 다른 그림 ‘신사와 와인 마시는 여인’(1660년 작, 베를린 국립회화관 게멜데 갤러리 소장)은 탁자 위에 와인병을 놓아둔 채 와인 마시는 여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실내에 놓인 가구와 와인으로 남자의 경제력과 신분을 짐작케 한다. 반면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 있는 ‘와인을 권하는 남자’는 앞서 베를린 그림과 비슷한 풍경이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이미 술에 취한 듯 묘한 웃음으로 화면의 정면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과 그녀에게 와인을 권하는 남성, 그 옆에 의자에 앉아서 모르는 척 딴짓하고 있는 또 다른 남자 등 세 명이 등장한다. 테이블 위의 와인이 담긴 흰색 도자기가 있고, 남자는 이미 취한 것 같은 여성에게 자꾸 와인을 권하는 음흉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그림 속에서도 자기로 만든 포도주 병과 와인 잔은 유혹과 부유함의 메타포로 묘사돼 있다.

와인잔, 유흥에 대한 경고 메시지도

페르메이르가 그린 ‘뚜쟁이(The Procuress)’(1656). [사진 드레스덴 고전 거장 미술관]

페르메이르가 그린 ‘뚜쟁이(The Procuress)’(1656). [사진 드레스덴 고전 거장 미술관]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하고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최고 번영기를 누리게 되는데, 와인잔은 델프트 자기와 더불어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제적 화려함을 상징한다. 깨끗하게 치워진 집안, 튤립과 히아신스가 꽂혀 있는 꽃병, 반짝반짝 닦아놓은 은식기 위에 놓인 빵과 치즈 등은 오직 이 시기 네덜란드와 저지대 지역에서만 그려진 독특한 주제이며 화풍이었다. 반면 개신교 가운데 가장 엄격한 칼뱅파 신자가 많았던 사회였기에 경계해야 할 풍속의 의미로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근면을 강조하고 사치와 허세, 게으름을 배격하는 가치관이 시대정신이었으므로 와인잔은 흥청망청 과소비와 유흥에 대한 경고라는 해석이다.

세계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찍부터 와인 무역에도 눈길을 돌렸다. 네덜란드 화가 페르디난드 볼의 ‘암스테르담 와인 상인회 지도부’ 단체 초상화(1663년 작, 뮌헨 알테 피타코텍 미술관 소장)가 바로 당시 네덜란드의 와인 무역 파워를 상징한다.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 독일의 라인지역 등 가까운 곳뿐 아니라 스페인의 말라가, 이탈리아의 마르살라, 그리스, 남아공 등 지구촌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싣고 왔으며 암스테르담뿐 아니라 로테르담이 주요 와인 수입항구 역할을 담당했다. 로테르담은 라인강과 바다가 만나는 입구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당시 최고의 와인 시장인 런던에 판매할 고급 와인을 확보하기 위해서 보르도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일찍부터 물 관리와 낮은 땅 간척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네덜란드 토목 전문가들은 보르도, 특히 메독 지방의 질퍽한 늪지대를 최고급 포도 농원으로 바꿔 놓았다. 이 과정을 통해 메독 지역과 명품 와인의 상징 마고(Margaux) 마을의 명성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마고 지역의 샤토 지스쿠르, 샤토 뒤 테르트르는 네덜란드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페르메이르 작품 세 점 속에서 와인의 모티브는 시대정신의 반영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능과 성적인 유혹을 강조한 걸까? 화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어 문맹자의 답답함 같은 걸 느낄 때면 나는 그 핑계로 빨간 물 한잔을 다시 찾게 된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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