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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들으면 상대 어떨까’ 한 번 생각해야 ‘말빚’ 안 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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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18면

[지혜를 찾아서] ‘국민 아나운서’이금희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만난 이금희 아나운서는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영재 기자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만난 이금희 아나운서는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영재 기자

‘말하기를 테크닉이 아닌 태도로 접근하는 독보적인 진행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들여서 말하기를 해온 사람.’

‘국민 아나운서’ 이금희 씨가 최근 펴낸 책 『우리, 편하게 말해요』(웅진지식하우스)의 저자 소개 글이다. 다들 공감할 것 같다. 차분하고 편안한 진행, 출연자를 배려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의 장수 비결이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취재진을 위해 준비한 간식 보따리. 최영재 기자

이금희 아나운서가 취재진을 위해 준비한 간식 보따리. 최영재 기자

이금희 아나운서는 KBS 〈아침마당〉을 18년 동안 진행하면서 2만3500명을 인터뷰했다. 숙명여대 겸임교수를 하면서 15년간 1500명의 학생들과 30분씩 티타임을 갖기도 했다.

말하기는 인간관계의 알파와 오메가다. ‘말하기의 지혜’를 얻기 위해 이금희 아나운서를 만난 곳은 그의 친정인 서울 여의도 KBS 신관이었다.

회사 부장님, 위만 보지 말고 아래도 봐야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강조하시죠.
“독백이 아니라면 모든 대화는 들어야 말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잘 듣지 않아요. 여럿이 대화를 나누면 ‘저 사람 얘기 끝나면 내가 뭐 말해야지’ 생각만 하죠. 제가 KBS 막내 때 이희호 당시 영부인이 아나운서 10여 명과 간담회를 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춰주시고 경청하고 메모하시는 걸 보면서 ‘아, 이 분은 믿을만한 분이구나’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낮고 천천히 말하는 게 신뢰를 준다면서요.
“보험사에서 ‘올해의 보험여왕’으로 뽑힌 분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분들의 공통점이 체구는 자그마하고 조용조용 천천히 말씀하시는데 그 속에 힘이 느껴지는 거예요. 내성적인 사람에겐 힘이 있어요.  그 힘을 인지하고 잘 쓰면 됩니다. 톱 배우 중에도 내성적인 분이 의외로 많아요.”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티타임을 가진 걸로 유명한데요. 무슨 얘기를 하셨나요.
“방송계에 진출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선배로서 조언과 경험담을 들려줄 생각이었죠. 그런데 아이들의 1/3 정도가 자기 얘기를 하면서 우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누군가 내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것 자체에 울컥하고 마음이 열리는 거였어요. 토요일마다 5~6명씩 만났는데, 월요일에 강의실 들어가면 애들 눈빛이 달라요. 하트가 뿅뿅 나오는 걸 보며 참 감사했죠.”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나요.
“오후 1시 반에 시작하는 3시간짜리 수업에 꼭 30분 늦는 친구가 있었어요. 예술 전공 학생인데 밤을 꼬박 새면서 작업하고 고민도 하다가 아침에 잠들면 낮에 일어나기가 힘들대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스타일이죠. 그 아이에게 ‘집에 고양이나 강아지, 아니면 식물이라도 하나 키웠으면 좋겠다. 그래야 밥이나 물 줄 시간에 맞춰 너도 식사를 할 수 있잖아. 네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지만 남은 수업에는 시간을 지키도록 노력해보자’고 했는데 그 뒤로는 지각을 안 하더라고요.”
그 친구를 통해 어떤 걸 느끼셨나요.
“우리는 단점을 지적해 주는 게 애정이라고 생각해요. ‘조언을 해 줘야지’ 하는 마음에 기다리지를 못하죠. ‘너를 위해서 하는 얘긴데…’ 하면서 자신이 답답한 부분을 말해요. 그건 ‘널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 친구의 단점으로 보이는 모습도 형성된 이유가 있고, 고치고 싶은데 남이 먼저 얘기하면 더 마음이 상할 수도 있잖아요. ‘널 위해서’라고 한다면, 말하는 것보다 먼저 들어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단짝인 이상벽씨와 함께 〈아침마당〉을 진행할 당시의 이금희 아나운서. [사진 이금희]

단짝인 이상벽씨와 함께 〈아침마당〉을 진행할 당시의 이금희 아나운서. [사진 이금희]

이금희는 딸만 다섯 있는 집안의 넷째였다. 어려서부터 말하는 걸 워낙 좋아해 학교에서 배워온 것을 그대로 엄마에게 중계방송 했다. 네 번째 똑같은 내용을 듣는데도 어머니는 “아유, 재밌네”를 연발하며 폭풍 리액션을 해 줬다. “이금희 아나운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말을 들으려고 온 것처럼 편안하게 진행하네요”라는 사람들의 말에 그는 “어릴 적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얻은 긍정적인 원(原)체험의 힘”이라고 했다. 원체험이 말하기의 기본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원체험이 없거나 부정적인 원체험만 있는 사람은 어떡하나요.
“어느 40대 여성이 ‘집안 분위기가 워낙 권위적이고 의사 표현이 꽉 막힌 환경에서 자랐어요. 내가 말을 잘 못하고 어른들 앞에서 어려워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던 걸 깨닫고 나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됐죠’ 하더라고요. 본인의 원체험은 썩 좋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 특히 우리 아이들이 멋진 원체험을 할 수 있게 역할을 해줄 수 있잖아요.”
소통 부재의 대명사로 ‘우리 회사 부장님’이 꼽힙니다. 그분들께 해주실 말은?
“부장님이 어디를 보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어요. 위를 보고 계시면 계속 가시면 돼요. 그건 자기 노선이잖아요. 그런데 위만 보시면 아래를 놓칠 확률이 높을 거예요. 만약 아래를 보신다면 그냥 봐주시기만 해도 좋아요. ‘MZ 세대는 우리 세대와 너무 다르고, 그래서 힘들다’고 하시는데 우리도 한심하고 걱정스러운 시절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 마음으로 도와주세요. 부장님은 신입사원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신입사원은 부장이었던 시절이 없잖아요.”
퇴근 시간에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고 계신데, 재미있는 일도 많죠?
“퇴근길에 지친 분들이 ‘하루 종일 안 좋았어요. 부장님한테 깨졌고요. 지하철 환승 때 두 번 다 눈앞에서 놓쳤어요’ 같은 사연을 많이 보냅니다. 저는 ‘오늘 정말 힘드셨죠. 근데 마지막이 좋네요. 지하철을 두 번 놓치는 바람에 사연이 소개됐고, 제가 선물도 드리잖아요’라고 합니다. 저는 ‘한 가지의 법칙’(찾아보면 한 가지 좋은 점은 있다)과 ‘한 자리의 법칙’(주차하러 가면 한 자리는 있다)의 신봉자입니다. 말이 씨가 될 뿐만 아니라 열매도 되고, 내 삶을 바꾸는 원동력도 됩니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이금희]

이금희 아나운서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이금희]

이쯤에서 내 얘기를 꺼냈다. “제 혈액형이 ‘울트라 슈퍼 A형’인데요. 잘 참다가 욱 하고 튀어나오는 바람에 관계가 깨진 경우가 많습니다.” 이 아나운서가 웃으며 말했다. “순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잖아요. 참고 참다가 터뜨리는 건데 상대는 모르거든요.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지?’ 하는 거죠.”

보험여왕 공통점은 조용하게 천천히 얘기

이금희표 솔루션이 나왔다. “화난 정도를 1~7로 봤을 때 1이나 2 수준에서 그 감정을 처리해야 합니다.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다가 화가 올라오면 3000원 쓸 요량 하고 커피숍으로 들어간다든지. 친구가 나타나면 나(I)를 주어로 말하세요. ‘넌 왜 매번 늦냐’가 아니라 ‘나는 네가 번번이 늦어서 힘들어. 기다리는 동안은 내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이런 식으로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는데 그 불안을 잠재우려면?
“각자 자신에게 맞는 시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남의 시계에 내가 맞출 필요가 없어요. 저는 아이들 좋아해서 조카들을 잘 돌봤고, 애를 셋은 낳을 줄 알았어요. 어느 날 결혼하고 애 키우는 친구들을 보며 ‘난 반쪽짜리 인생인가’ 싶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싱글이라서 좋은 점이 많아요. 만약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오십 대 후반을 향해 가지만 신혼인 거잖아요. 그게 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인 거죠.”
그렇다면 새로운 인연을 만날 생각이 있는 거네요?
“(크게 웃으며) 있어요. 있어요. 근데 언제부턴가 소개팅이 안 들어와요. 한번 갔다 온 사람도 괜찮은데…. 저는 가치관과 취미가 통하는 사람이 좋아요. 예를 들면 책 읽는 거, 같이 산책하는 거, 영화나 공연 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요.”

헤어질 시간이 됐다. ‘말빚’을 안 지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걸 알려달라고 했다. 즉시 답이 나왔다. “‘이 말을 들으면 저 사람이 어떨까’ 한 번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면 같은 말이라도 완곡하게 할 수 있거든요.”

이 아나운서는 인터뷰 전에 “끝나고 출출하실 테니 드세요”라면서 간식 보따리를 내놨다. 나중에 열어 보니 낱개로 포장한 수제 약과였다. 인터뷰 전날엔 “차량 갖고 오시면 번호 알려주세요. 주차등록 해 놓을게요”라고 알려왔다. 취재차량이 출구를 통과하는 순간, 차단기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이금희는 말의 힘이 ‘배려’에서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지혜였다.

이금희 1989년 KBS 16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6시 내고향〉, 〈사랑의 리퀘스트〉 등 굵직한 프로그램을 맡으며 KBS 간판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특히 18년간 〈아침마당〉 진행과 10년간 〈인간극장〉 내레이션을 통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이 됐다. 2007년부터 KBS FM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마이금희〉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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