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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이름 부르지 않아도 이미 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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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종교로써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신부가 서울 한복판 길거리 미사를 집전하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그다음 날 방송에 나와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 패륜이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패륜하는 기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부에 따르면 이름을 부르는 건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기도 의식이란다.
패륜(悖倫).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그러짐, 또는 그런 현상. 국어사전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희생자들의 영혼은 '패륜'을 넘나드는 호명(呼名)을 달가워할까. 특히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면.

이름 공개가 진짜 애도라는 궤변
유족 심경 고려 부족 스스로 인정
공감이라는 이름의 폭력 멈춰야

희생자 명단은 '시민언론 민들레'라는 단체 홈페이지에 아직 떠 있다. 항의가 들어오면서 30명 가까운 이름이 OOO로 처리됐다. '민들레'는 부담을 못 이겼는지 명단 공개의 취재와 이유에 대해 장황한 설명의 글을 띄웠다. '명백한 사회적 죽음'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의 극치' '남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뭔가 찾는 노력' 같은 구절이 보인다. 그까지는 이해된다. 그러나 다음 문장. "명단 공개가 우리 자신의 완전한 확신과 빈틈없는 준비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고 감히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유족들의 심경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충분했느냐에 대해 감히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에 추모 메세지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에 추모 메세지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무슨 말인가. 선의만은 훌륭했다, 그러니 이해해 달라? 명색이 '언론'을 자처하는 곳에서 이런 유아기적 발상을 부끄럼도 없이 내뱉는다. 개인정보보호법, 혹은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말을 들먹이는 것도 아깝다. 법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그들이 이름 외에 희생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뭔가. 울고 웃던 얼굴, 사소한 버릇,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중 단 하나라도 아는 게 있는가. 아무리 뜻이 좋다 한들 생면부지 사람들이 남의 이름을 함부로 이용할 권리가 있는가. '민들레'는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름만으로 개인이 특정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명단 공개가 어떻게 구체적 애도의 출발점이 되는가.

개인적 생각을 말해도 된다면, 내가 어쩌다 불행한 일에 휘말렸을 때 나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먹이는 건 싫다. 더구나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 전체 희생자 명단, 사진, 프로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된다면 끔찍하다.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는 가급적 본명을 쓰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이름이 주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임금이나 죽은 어른의 본명을 '휘(諱)'라고 했다. '꺼린다'는 뜻이다. 심지어 웬만한 양반·문인들은 지인들끼리 본명 대신 자(字)나 호(號)로 불렀다. 추모한답시고 함부로 부른 이름에 모욕과 조롱이 주술처럼 붙는다면 그네들은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공감의 진짜 뜻이 흐려진 지 오래다. 진영 대립이 거세지면서 '선택적 공감'이라는 희한한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참사를 정치화하려는 세력이 즐겨 내세우는 단어가 공감이다. 이번 명단 공개는 공감이라는 말조차 붙이기 어렵다. 폭력일 뿐이다. 최근 『공감의 반경』이라는 책을 낸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는 "공감은 인류 역사 속에서 갈등의 치료제였을 뿐만 아니라 증폭제로도 작용했다"고 말한다. 이번이 딱 그런 경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세상에 어떤 참사에서 이름도 얼굴도 없는 곳에 온 국민이 분향하고 애도를 하냐"는 말로 논란을 자초했다. 당 일부에선 여전히 실명 공개를 주장한다. 가짜 공감들이다. 이런 야당을 공격하는 여권도 민망하긴 마찬가지다. 참사 3주일이 되도록 책임지고 물러난 고위직이 하나도 없다. 가짜 공감보다 더 무서운 '무공감'이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이미 커다란 사회적 의미가 됐다. 이름 부르지 않아도, 영정 사진 하나 없어도, 이미 그들은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