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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세월호 이은 이태원, 또 희생을 낭비할 텐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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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부모 주검은 산에 묻고 자식 주검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치유와 망각 없는, 세상사에서 가장 비통한 슬픔이 생때같은 자식들을 앞세우는 일일 테다. 아들 잃은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던 시인 김동리는 ‘진이 한 조각 구름 되어 날아간 날/ 하늘엔 벙어리 같은 해만 걸렸더라…’고 했고, 작가 박완서는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신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한 말씀 해보시라’고 절대자를 향해 절규했다.

대한민국이 그 무게와 깊이를 측량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한 슬픔과 고통의 늪에 빠졌다. 선미 끝자락만 물 위로 삐죽 솟아 있던 세월호의 참담한 기억이 생생한데 이번엔 서울 한복판에서 158명의 곱디고운 젊음이 산화했다. 형언할 수 없는 참척(慘慽)의 굴레가 남은 자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회한으로 돌아온다. 이 어이없는 죽음의 원죄로부터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는 묵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태원 골목길을 지날 때면 그날 밤처럼 숨 막히고, 천막 광장에 놓인 희생자들 넋에 국화 한 송이 헌화조차 가슴 아리다.

유족 동의없는 희생자 명단 공개
비극마저 정권 겁박의 수단 삼나
정치, 세월호 참사 낭비한 책임 커
여권, 책임론 차단 급급해 화 키워

그런데 위정자들 세상은 딴판으로 굴러간다. 슬픔과 공감하지 못하는 희한한 일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책임 떠넘기기, 희생양 찾기에서 이젠 비통한 희생조차 제물로 삼으려 한다. 야당 정치인과 친야 성향의 전직 기자가 ‘언론’이랍시며 급조한 인터넷 매체가 유가족 동의 없이 희생자 155명의 명단을 공개하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희생자들을 호명하며 ‘추모 미사’를 열었다. 유가족 2차 가해 논란과 재난의 정치화 공방이 정치권을 달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어떻게 이름도, 얼굴도 없는 곳에 온 국민이 분향하고 애도하는가”라고 했는데, 문상객이 상주 나무라는 격이다. 어불성설이다. 명단 공개를 원치 않는 상당수의 유가족 가슴에 비수 꽂기다. 희생자 한 사람 알지 못해도 가슴속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납덩이 같은 가위눌림을 경험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 추모도, 애도도 그들에겐 고작 정치 놀음과 정권 겁박의 수단일 뿐인가 탄식하게 된다. 벌써 광장에선 ‘촛불’ ‘퇴진이 추모’ 구호가 들려온다. “희생자들을 익명의 그늘 속에 묻히게 함으로써 파장을 축소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재난의 정치화이자 정치공학”이란 야당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희생자 실명 공개가 그들의 정치공학적 이해득실에서 나온 것임을 일깨운다.

추모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참사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가 여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뜻이다. 애도에 몰두하고 증오를 키운다고 저절로 안전한 사회가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태원 참사는 8년 전의 세월호 참사를 낭비한 데도 그 원인이 있다는 걸 정치는 직시해야 한다. 비극을 정치 놀음에 허비한 참혹한 대가에 숙연해져야 한다.

세월호 조사는 아홉 차례, 572억원을 쓰고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과학의 영역이어야 할 침몰 원인에 대해서조차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 ‘내인설’과 ‘외압설’의 2개 보고서로 마감했다. 조사위 조사관으로 참여했던 박상은씨는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에서 “책임자 처벌에 매달리지 않고 사회구조적 원인 규명을 임무로 생각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누가 잘못했는지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질문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특조위와 사참위에서 활동한 김민후 변호사 역시 “특정인과 특정 세력을 타기팅해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정치적 이득을 채우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며 “‘박근혜 7시간’을 놓고 싸우는 바람에 정쟁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이태원 참사가 ‘제2의 세월호’가 돼가는 데는 정부 여당의 무능과 책임이 크다. 그들 주장대로 설사 ‘예견하지 못한 사고’였다고 쳐도 사고 발생 3주일이 다 되도록 그들이 보인 실망스러운 모습이 분노를 촉발한다. 정부 컨트롤타워와 위기 대응 매뉴얼의 부재, 경찰 지휘부의 태만과 실무자에게 책임 떠넘기기, 잇따른 설화에도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장관, 그리고 ‘여당이 장관 하나 못 지키나’는 윤핵관의 때아닌 결사옹위…. 내 눈엔 책임론 불 끄기에 급급한 모습이 오히려 집권세력 스스로를 ‘박근혜 7시간’의 프레임에 옭아매는 자충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또 한 번의 희생이 낭비된다면 ‘안전한 사회’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그러니 정말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부터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칸트의 비유를 빌리자면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 없는 재발 방지는 공허하고, 재발 방지를 견인하지 못하는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은 맹목적인 것이다.

참사에서 교훈을 얻어 안전사회를 만든 선진 사례가 여럿 보도됐다. 미국 시카고의 초등학교(our lady of the angels) 화재 사건,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불꽃놀이 관람객 압사 사건 이후 각각 화재 대피 훈련, 다중 밀집 대응 매뉴얼이 정착됐다. 완전하진 않지만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된 건 틀림없다. 문명국가는 이렇듯 희생을 낭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