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4·16에서 10·29, 기자가 변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악당, 영웅, 무고한 희생자. 참사 현장에서 기자의 눈과 발은 여기로 쏠린다. 초년병 시절에 그렇게 단련된다. 악당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부실한 제도, 그릇된 관행이 단두대에 올려지기도 한다. 영웅은 자기 직분에 충실했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애를 발휘한 보통 사람인 경우가 많다. 무고한 희생자는 비극적 사건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에서 비롯됐는지를, 그리고 그 변고가 어쩌면 나와 내 가족에게 닥쳤을지도 모르는 것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실감케 한다.

희생자 사연 캐기에 신중해진 언론 #세월호 여파로 관행과 헤어질 결심 #'이름 장사' 하는 자칭 언론이 구태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놓인 꽃, 메모지, 촛불. 최영재 기자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놓인 꽃, 메모지, 촛불. 최영재 기자

이태원 참사에도 언론은 악당과 영웅을 쫓았다. 제 할 일 하지 않은 경찰 간부와 구청장이, 그 좁은 골목을 더 좁게 만든 호텔과 그것을 방치한 공무원들이 여론의 심판대에 올려졌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한 김백겸 경사와 다수의 시민이 영웅으로 조명받았다. 그런데 무고한 희생자의 이야기를 담은 보도는 과거에 비해 크게 줄었다. 158명의 희생자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픈 사연을 안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고, 그 참사의 비극이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애절한 고통을 안겼을 터인데도 무심하게 보일 정도로 이에 대한 보도가 적었다.

정치적 파장을 줄이려는 협잡이 이 현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정권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까지 덧붙였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은 희생자의 실명을 쓰며 유족을 인터뷰해 보도하는데 한국 언론은 희생자 명단조차 전하지 않는다며 억지를 부렸다.

권력과의 유착, 어림없는 얘기다. 그런 주문을 하면 머지않아 세상에 다 공개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면 바보다. 가정에 가정을 거듭해 그런 요구가 있었다고 해도 그걸 현장의 젊은 기자에게 전달할 만큼 언론사 간부가 어리석지 않다. 대형 사건의 한복판에서 뛰는 기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다. 사(邪)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

참사 발생 직후에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흥지 인상을 강하게 주는 사건 발생지와 낯선 서양 풍습인 군중 밀집 요소가 그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희생자 이름을, 그가 누군지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정보를 전하는 데 기자들이 몹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희생자 사연 보도가 드물어졌다.

더 근원적 이유는 대형 참사를 대하는 언론계 전반의 태도 변화다. 잠시 8년 전 세월호 참사 현장에 있었던 기자가 쓴 글을 보자. ‘가족들의 반응만 영상에 담기에 바빴다. 등 뒤에서는 아이들이 바다에 빠져 죽고 있는데 내 카메라는 실종자 가족들의 눈물만을 향해 있었다. (중략) 수많은 매체는 그들이 통곡할 때마다 모기떼처럼 매달려서 상황을 붙잡고 있었다. (중략) 어느 순간부터 취재기자나 나나 그들의 눈물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방송기자연합회가 낸 책  『세월호 보도…저널리즘의 침몰』의 한 대목이다.

그 전대미문의 대참사에 언론은 늘 했던 대로 행동했다.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학생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친구들 사망에 대한 감정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넋 놓고 바다만 바라보는 실종자 부모에게 아픈 가족사를 들춰내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다. 언론 매체가 폭발적으로 늘어 사연 발굴 경쟁이 과열됐고, 포털 조회수라는 당근이 그걸 부추겼다.

여기에 초기의 ‘전원 구조’ 오보 사태까지 겹쳐 언론이 원성을 샀다.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널리 퍼지며 트라우마를 남겼다. 언론계는 반성을 담아 ‘재난보도준칙’을 만들었다. 길게 쓰여 있지만, 핵심은 피해자와 주변 사람의 상처 치유가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8년 전 팽목항과 안산시에 있던 신참 기자가 어느덧 중견 기자가, 당시의 지휘 책임자들이 언론사 주축이 됐다. 그들은 ‘사연 캐기’라는 관행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

세월호 참사 뒤에 별로 변한 게 없다고들 말한다. 다행히 언론은 이렇게 다소나마 진화했다. 희생자 명단을 내걸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장사를 하는 자칭 언론도 있지만, 세상은 분명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