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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필적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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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팀 기자

박형수 국제팀 기자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이해인 수녀의 시 ‘작은 노래 2’의 한 구절이다. 지난해(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필적확인 문구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수능이 끝난 뒤 전문이 궁금해 시집을 사봤다는 수험생의 후기가 적지 않았다.

전년도 수능의 필적확인 문장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이었다. 나태주 시인의 ‘들길을 걸으며’의 한 대목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시험지를 펼쳤던 수험생들은 이 문장을 옮겨 적다 울컥했다고 얘기했다.

필적확인은 2005학년도 수능 때 대리시험 등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각돼 다음 해 도입됐다. 겹받침 등 필적확인에 필요한 기술적 요소가 포함된 12~19자 문장 중에 수능 출제위원이 선정한다. 수험생들은 과목이 바뀔 때마다 이 문구를 OMR 카드에 자필로 기입해야 한다.

‘부정행위 방지’ 차원에서 도입된 제도지만, 해가 갈수록 수험생을 위로·응원하고픈 출제위원들의 마음이 진하게 묻어난다. 제도가 처음 도입된 2006학년도엔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정지용, ‘향수’)이 실렸는데 최근엔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2019, 김남조의 ‘편지’), ‘너무 맑고 초롱한 그중 하나 별이여’(2020, 박두진의 ‘별밭에 누워’) 등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능시험은 스무 살 안팎의 수험생이 처음 맞이한 첨예한 경쟁의 순간일 수 있다. 시험장 공기가 차갑고 살벌해도, 따뜻한 문장엔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출제위원들 역시 문장의 힘을 믿기에, 온기가 담긴 한 줄 문장을 정선한다.

한 줄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비단 수험생뿐일까. 최근 우리는 이태원 압사 참사를 목격했고, 코로나19와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여전하다. 위로가 마땅한 이때 ‘웃기고 있네’ ‘개 파양’ ‘빈곤 포르노’ 등 증오와 혐오의 막말이 연일 쏟아진다. 종교지도자까지 ‘대통령 전용기 추락’이란 섬뜩한 저주의 주문을 쏟아내 충격을 안겼다.

장자는 “남에게 한 말은 자신을 향해 쏜 화살”이라 했다. 몰인정하고 독한 말끝의 결과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오늘 수능이다. 수험생뿐 아니라 어른들도, 올해 필적확인 문장을 적어보면 어떨까. 막말 대신 응원과 위로로 힘을 얻는 날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