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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수술비 필요…장기 팔까" 대출난민 마지막 끈도 끊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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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에서 도산공원 쪽으로 이어지는 거리. 캐피탈·대부업체 20여곳이 모여있는 이곳은 서울에서 제2‧3금융권이 가장 많은 곳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지난 15일 오후 이곳에 있는 한 대부업체를 찾았다. 대부업체 사무실에 머문 2시간 동안 10분 간격으로 대출 문의 전화가 꾸준히 걸려왔다.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객도 있었다.

건설 일용직에 종사한다는 60대 남성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간경변증에 걸린 30세 아들의 수술비가 급하다”며 신용 대출을 원했지만, 결국 돈을 빌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상담을 맡은 대부업체 직원은 “신용대출을 취급하지 않은 지 1년 정도 됐고 부동산이나 자동차 등을 저당 잡는 담보대출도 최근 6개월간 한 달에 1~2건 정도만 취급하고 있다”고 안내했다.

상담 내내 깊은 한숨을 내쉬던 60대 남성은 “거의 평생을 일용직으로 일해 은행(제1금융권) 대출은 꿈도 못 꾸고 그동안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대부업체에서 자금을 융통해서 썼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올해 들어 대출해주는 곳이 없다”며 “갈수록 병세가 악화하는 아들을 생각하면 장기매매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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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저신용자 등 금융 취약 계층의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행된 ‘법정 최고금리 인하’ 조치가 되레 이들의 목을 죄고 있다. 최고 금리가 낮아지면서 수익성이 악화한 대부업체가 대출 문고리를 걸어 잠그면서다.

제3금융권인 대부업체는 제도권 금융에서 대출을 받기 어려운 ‘대출 난민’인 금융 취약 계층의 마지노선이다. 일반적으로 시중은행인 제1금융권→저축은행 같은 제2금융권→대부업체 같은 제3금융권을 거쳐, 대부업체에서도 돈을 빌리지 못하면 결국 불법 사채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대부업자(금융위원회 등록업체 기준)는 2017년 1249개에서 지난해 940개로 줄었다. 대부업 이용자도 줄고 있다. 지난해 112만명을 기록했다. 2017년(236만7000명)과 비교하면 4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대부업체 대출 잔액도 줄고 있다. 2018년 14조8664억원에서 지난해 10조9866억원으로, 3년 만에 26% 감소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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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불법 사금융 피해는 늘고 있다. 한국대부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불법 사채 피해자의 의뢰 건수는 2933건으로, 이들은 평균 연 229%의 이자를 부담했다. 2년 전인 2019년엔 1048건(연 145%) 수준이었다.

여기에 대부업체까지 '우량 고객 고르기' 나서며 금융 취약계층의 어려움은 더 커지고 있다. 기준금리가 인상으로 시중은행의 신용대출 금리가 16%까지 치솟은 영향이다. 대부업체에서 최고금리를 적용한다고 해도 시중은행 금리와의 차이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대부업계 관계자는 “채권시장까지 얼어붙으니 은행에서 연 16%에 대출을 쓰겠다며 기업도 줄을 서는 상황”이라며 “은행이 기업대출에 집중하고, 금리 차이도 없어 신용 상태가 괜찮은 고객도 꽤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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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에 따르면 시중은행의 평균 신용대출 금리(6월 말 기준)는 연 6%다. 2년 전(2.9%)의 두배 수준이다. 일부 시중은행의 신용대출 금리는 16%대까지 치솟았다. 반면 최고 금리 20% 제약을 받는 대부업의 평균 대출 금리는 연 14.7%다. 2년 전보다 3.2%포인트 내렸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초 연 27.9%였던 최고 금리를 지난해 7월까지 두 차례 인하해 20%로 내렸다. 서민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지만, 수익성이 악화한 대부업체는 물론 제2금융권인 저축은행‧캐피탈까지 대출 문턱을 높이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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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업체는 대개 은행 등에서 돈을 빌려와서 다시 돈을 빌려준다. 현재 중견 대부업체는 저축은행 등에서 연 10~12% 금리로 돈을 빌려온다. 조달금리가 10%가 넘는 데다 돈을 빌려주고 회수하지 못하는 대손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대개 대손 비용(신용대출 기준)은 대출금의 15~20% 정도로 본다. 관리비용 같은 지출을 더하면 현재 최고 금리인 20%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최고 금리가 24%에서 20% 낮아진 지난해 7월 이후 대부업체 대부분이 신용 대출 대신 담보대출을 주로 취급했다. 하지만 두 달여 전부터 이마저도 중단하며 ‘개점휴업’에 들어간 업체가 늘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담보로 맡은 주택 등을 처분하기 쉽지 않아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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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삼동의 한 대부업체는 현재 주택 20여채를 보유하고 있다. 경매를 통해 팔아야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쉽지 않다. 이 업체는 연초만 해도 아파트 담보비율을 80%(KB부동산 시세 하한가 기준)까지 대출해줬지만, 지난달 초부터 60%로 낮췄다.

이 업체 대표는 “지금 경매를 신청해도 송달 등 과정을 거치면 빨라야 내년 4~6월에나 낙찰할 수 있다”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정치권은 최고 금리를 15%까지 낮추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흥진 강남 캐피탈 대부 대표는 “최고금리가 24%는 돼야 대부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데 20%로 떨어지면서 신용대출이 사라졌다”며 “15%로 내리면 담보대출도 사라지고 대부업계 자체가 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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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최고금리 더 내릴 경우 늘어나는 대출 난민은 결국 불법 사채 시장에 유입될 수밖에 없다”며 “대부업 시장이 정상 작동하려면 법정 최고금리를 탄력적으로 운용하거나, 최소 연 26.7% 이상으로 인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최고금리가 20%인 지금도 대부 시장에서 2조원의 초과 수요가 발생해 40여 만명이 대출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고, 최고 금리를 15%로 인하(기준금리 3% 기준)할 경우 256만명(12조8000억원)의 대출 난민이 발생한다.

임승보 한국대부금융협회장은 “최고금리 인하로 대부업권의 공급 기능이 악화했고 저신용 금융 취약 계층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며 “기준금리 변동에 따라 최고금리에 가산 금리를 더하는 방식 등 등 서민 대출 사다리 역할을 하는 대부업계에 대한 현실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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