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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죽음을 맹인이 목격했다면?…역사에 상상 더한 ‘올빼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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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빼미'는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의문스러운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이를 목격한 맹인 침술사가 있었다는 영화적 상상을 더한 팩션 스릴러다. 사진 NEW

영화 '올빼미'는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의문스러운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이를 목격한 맹인 침술사가 있었다는 영화적 상상을 더한 팩션 스릴러다. 사진 NEW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고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중략)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에 대한 가장 엄정한 기록이라는 실록에 이처럼 의미심장한 문장이 등장하는 건 드문 일이다. 23일 개봉하는 영화 ‘올빼미’는 바로 이 미스터리한 역사의 한 줄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 시대극인 동시에 현대적 감각이 살아있는 팩션(팩트+픽션) 스릴러를 완성해냈다.

“실록 한줄에 대한 호기심 따라가”

영화 ‘왕의 남자’(2005)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이후 17년 만에 상업영화 데뷔작을 찍게 된 안태진 감독은 다시금 역사에서 작품의 실마리를 찾았다. “많은 의심이 담긴 문장에 호기심이 생겨 그 배경을 따라가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안 감독은 실록에 기반해 소현세자가 ‘독살됐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기에 세자가 독살되는 장면을 유일하게 목격한 맹인 침술사가 있었다는 허구의 설정이 추가되면서 영화의 서스펜스가 촉발된다.

영화 '올빼미'는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의 존재에 불안감을 느끼는 인조의 모습 등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서사를 촘촘히 전개해나간다. 사진 NEW

영화 '올빼미'는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의 존재에 불안감을 느끼는 인조의 모습 등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서사를 촘촘히 전개해나간다. 사진 NEW

영화가 제목으로 삼은 야행성 조류 ‘올빼미’처럼, 침술사 경수(류준열)는 낮에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어두워질수록 앞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주맹증(晝盲症)이라는 흔치 않은 병을 앓는 경수는 “소인 같은 미천한 사람은 안 보이는 척이라도 해야 궁에 들어올 수 있다”며 사람들 앞에선 완전한 맹인처럼 생활한다. 그런 처지 탓에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봐버린 경수와, 보여서는 안 될 장면을 들켜버린 이들 사이의 하룻밤에 걸친 대립과 사투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소현세자 ‘독살설’ 바탕으로 상상력 발휘

역사에 허구를 더한 팩션이지만, 학계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돼온 소현세자 독살설을 기반으로 한 덕분에 실제와 허구가 어색함 없이 맞물린다는 게 ‘올빼미’의 큰 장점이다. 왕위를 계승할 세자를 감히 누가 독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사실 독살설에 가장 큰 설득력을 부여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아버지 인조(유해진)다.

병자호란 패배를 인정하며 청 태종 앞에 무릎 꿇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던 인조는 인질로 청에서 지내는 동안 신문물에 눈뜨고,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은 소현세자를 크게 경계했다고 전해진다. 본인 스스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만큼,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세자가 자신을 축출하진 않을까 위협을 느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소현세자의 사망 이후 석연찮은 인조의 대처, 세자의 부인 강빈(조윤서)을 향한 탄압 등도 모두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내용이다. 영화는 실록이 빈 칸으로 남겨둔 부분에서만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고증 오류 논란을 최소화하는 영리한 선택을 한 셈이다.

영화 '올빼미'는 밝은 곳에서의 시력이 어두운 곳에서보다 떨어지는 주맹증을 주요 소재로 택해 새로운 시청각 경험을 선사한다. 사진 NEW

영화 '올빼미'는 밝은 곳에서의 시력이 어두운 곳에서보다 떨어지는 주맹증을 주요 소재로 택해 새로운 시청각 경험을 선사한다. 사진 NEW

주맹증이라는 소재도 이 영화만의 독특한 질감을 완성하는 재미 요소로 적잖은 역할을 한다. 제작진은 주맹증을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스타킹과 물주머니로 카메라 앞을 씌우는 등의 촬영 방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불이 하나둘 꺼질수록 흐릿하게 앞이 보이는 경수의 시야를 똑같이 체험하게 되는 관객은 주변의 작은 움직임과 소리에 더 크게 눈귀를 열게 된다. 눈앞이 답답한 가운데 다른 감각들이 예민하게 살아나는 경험이 제법 신선하게 다가온다.

배우 유해진은 '올빼미'에서 배우 인생 최초로 왕 역할을 맡아 자신만의 광기 어린 인조를 완성했다. 사진 NEW

배우 유해진은 '올빼미'에서 배우 인생 최초로 왕 역할을 맡아 자신만의 광기 어린 인조를 완성했다. 사진 NEW

인생 첫 왕 역할 유해진 “등장에 웃을까 걱정”

데뷔 25년 만에 처음 왕 역할을 맡은 유해진을 필두로 한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역할로 익숙한 유해진은 안 감독이 조감독을 했던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광대를 연기한 인연이 있다. 15여년의 세월을 지나 자신에게 인조 역을 들고 찾아온 안 감독에게 유해진은 “왜 하필 나냐”고 물었다고 한다. “처음 등장할 때 관객들이 웃으면 어떡하나 싶었다”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그만의 새로운 인조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후반부로 갈수록 불안감과 광기에 휩싸여 구안와사까지 앓는 모습을 특수분장 없이 소화했다.

소현세자 역을 연기한 배우 김성철은 짧은 분량에도 작지 않은 존재감을 남긴다. 사진 NEW

소현세자 역을 연기한 배우 김성철은 짧은 분량에도 작지 않은 존재감을 남긴다. 사진 NEW

경수 역의 류준열도 자칫 어색해 보일 수 있는 맹인 연기를 흠잡을 데 없이 해냈다. 진실을 목격하고도 보이지 않는 척 초점 잃은 표정 연기부터 소현세자의 죽음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다가도 두려움에 떠는 모습까지, 시시각각 휘몰아치는 감정 연기가 극의 흡인력을 높인다. 길지 않은 분량에도 존재감을 잃지 않은 소현세자 역의 김성철을 비롯해 후궁 소용 조씨 역의 안은진, 강빈 역의 조윤서 등 비교적 새로운 얼굴들도 뇌리에 남는 연기를 선보인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의 전개가 부실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긴장감이 사라지고 나서도 궁금증의 여운이 남게 되는 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다. “눈 감고 사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못 본 척해야 살 수 있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던 경수가 종국에는 “내가 분명히 보았다”고 울부짖는 지점에서 관객들은 진실에 침묵하지 않는 이들의 용기, 혹은 때로 진실에 눈감는 이들의 비겁함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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