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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세상](52) "칼과 도끼는 악순환만 부를 뿐…"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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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뀌면 여지없이 시작되는 게 적폐청산이다. 사정의 칼날이 번뜩인다. 이번 정권도, 전 정권도, 그 앞 정권도 그랬다.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저 악의 세력을 다 쳐내면 밝은 세상 되겠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날 계강자(季康子)가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계강자는 노(魯)나라의 권신. 막강한 권력으로 정적들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우리 정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핵심 관계자였던 셈이다.

공자가 답한다.

"정치한다는 사람이 어찌 칼로 싹 쓸어 버릴 생각만 하는가. 그대가 선(善)하면 백성들도 따라 선하지 않겠는가(子爲政,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공자는 그러면서 유명한 말을 남긴다.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군자의 덕은 바람(風)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草)과 같다. 풀은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방향으로) 눕게 되어있다.

공자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얘기다. "선정을 펼쳐라, 그러면 백성들은 감읍해 고분고분 따라올 것이다"라는 뜻이다.

현대 정치와는 영 맞지 않는다. 본래 착한 리더는 드물고, 백성들은 못된 리더를 표로 심판하는 게 오늘 정치 모습이다. 심지어 탄핵도 한다.

그런데도 공자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순종적인 백성'이 아니라 '리더의 바른 행실'에 방점이 찍혔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정치 리더가 바람과 같은 덕을 갖춰야만 백성들은 순응한다'라고 해석해야 맞다.

'어떻게 하면 악의 세력을 싹 쓸어버릴 것인가'라는 생각을 갖기에 앞서 '어찌 훈풍을 불게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늘진 세상 곳곳을 파고들어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활력을 돋아주는 훈풍이어야 한다... 주역 '풍(風)'괘의 가르침이다.

'어떻게 하면 악의 세력을 싹 쓸어버릴 것인가'라는 생각을 갖기에 앞서 '어찌 훈풍을 불게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늘진 세상 곳곳을 파고들어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활력을 돋아주는 훈풍이어야 한다... 주역 '풍(風)'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리더가 지녀야 할 '바람의 덕(德風)'은 무엇인가?

주역 57번째 괘 '손위풍(巽爲風)'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손(巽, ☴)이 위아래로 겹쳐있다. 손괘가 겹쳤다 해 '중풍손(重風巽)'으로도 불린다.

바람은 그침이 없다. 태양 빛은 나무에 가려 음지를 비출 수 없지만, 바람은 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구석구석 파고든다. 풀을 어루만지고, 나무에 생기를 돋게 한다. 이런 바람이니 풀도 자신을 내맡긴다. 그래서 '순응의 괘'로 통한다.

공자는 괘의 형상을 인간사에 빗대 풀이한 대상전(大象傳)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隨風巽, 君子以申命行事
잇따르는 바람이 손괘의 형상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명령을 펼치고, 일을 시행한다.

바람이 이어진다는 건 알겠다. 바람은 원래 불고 또 부는 거니까 말이다. 이를 본받아 명령을 펼치고, 일을 진행한다고? 무슨 뜻인지 애매하다.

송(宋)대 주역 전문가 정이천의 해석을 보면 대략 이해가 간다. 그는 "손괘(☴)가 위아래로 겹쳤기에 '잇따른 바람(隨風)'이다"라고 했다. 위아래로 서로 순종한다는 뜻으로 봤다. 리더의 일방적인 명령도 아니고, 백성들의 일방적인 순종도 아니다. 상호 존중이다.

命令政事, 順理則合民心, 而民順從矣.
명령과 정치가 순리에 맞아야 민심에 부합하고, 백성들은 순종한다.

훈훈한 바람처럼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리더라야 백성들은 기꺼이 몸을 굽혀 순응한다. 그 속에서 시책이 만들어지고, 정사를 펼쳐야 한다. 그게 신명(申命)의 뜻이다. 그래야 정책 추진도 탄력을 받는다(行事).

훈풍에 흔들리는 부드러운 들판…
공자가 말한 덕치의 세상이다.

주역 57번째 괘 '손위풍(巽爲風)'은 바람으로 상징되는 손(巽)이 위아래로 겹쳐있다. 바이두

주역 57번째 괘 '손위풍(巽爲風)'은 바람으로 상징되는 손(巽)이 위아래로 겹쳐있다. 바이두

어떻게 해야 하나. 군왕의 길을 제시하는 다섯 번째 효사(爻辭)는 이렇게 말한다.

無初有終, 先庚三日, 後庚三日, 吉
처음에는 없지만 결국 마지막엔 이뤄낸다. 정책 시행에 앞서 충분히 따지고, 시행 후에도 신중하게 살펴야 길하다.

군왕이 시정을 펼치는 일(政事)의 근본을 얘기하고 있다. 모든 정책은 무엇인가를 이뤄내기 위한 것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하기 위함이다. '庚(경)'은 10간(干,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7번째 줄기. 변혁을 상징한다. 여기에서는 '정책을 새로 시행하는 날'이라고 보자.

뜬금없이 정책을 발표하고는 '이대로 하시오'라고 하면 백성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홍보도 해야 한다. 교통과 통신 시스템이 빈약했던 주역의 시대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제도가 시행된 미비한 게 없는지, 당초 예상과 다른 게 없는지 살펴야 한다. 한마디로 신중하라는 얘기다.

집값을 잡겠다고 대책을 툭툭 던진다. 사전에 시장(市場)과 충분히 상의하고, 미칠 영향을 다각도로 고려해야 한다. 그게 안 되니 내놓는 대책마다 오히려 집값을 부추긴다. '선경삼일 후경삼일(先庚三日 後庚三日)'해야 한다.

바람은 숲 곳곳을 파고든다. 그래서 통풍(通風)이다. 나라 정책도 그래야 한다. 국민과 충분히 소통하고,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백성들은 순종하고, 몸을 굽혀 따른다. 그렇다고 괘가 유약함을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進退, 利武人之貞
나아가고 물러섬에 있어 무인의 곧음이 이롭다.

첫효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공손함이 유약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을 시행하면서 머뭇거린다면 그건 공손이 아니다. 무인의 강단이 있어야 공손함도 빛난다는 얘기다.

공손함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발전적 순응이요, 능동적 순종이다. 온 정성을 다 들여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두 번째 효사는 이를 표현하고 있다.

用史巫粉若, 吉, 無咎
축사와 무당처럼 정성을 다하니 길하고, 허물이 없다.

축사(祝史)는 하늘의 뜻을 묻기 위해 점을 쳤고, 무당은 가무로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하늘은 곧 백성이다. 주역의 시대 축사와 무당이 하늘과 소통할 때 온 정성을 다했듯, 오늘 정치 리더는 국민과의 소통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게 '풍(風)'괘의 큰 가르침이다.

바람은 숲 곳곳을 파고든다. 나라 정책도 그래야 한다. 국민과 충분히 소통하고,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백성들은 순종하고, 몸을 굽혀 따른다. 바이두

바람은 숲 곳곳을 파고든다. 나라 정책도 그래야 한다. 국민과 충분히 소통하고,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백성들은 순종하고, 몸을 굽혀 따른다. 바이두

'저 범죄자 무리를 싹 쓸어버리면 밝은 세상이 되겠죠…?'

그래서 범죄가 사라졌는가?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 적폐청산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바로 그 시간 또 다른 적폐는 쌓여간다. 정권이 바뀌면 내가 거꾸로 당하지 않으리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공자가 말한 '덕풍(德風)'의 의미를 먼저 살펴야 한다. '어찌 싹 쓸어버릴 것인가'라는 생각보다는 '어찌 훈풍을 불게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늘진 세상 곳곳을 파고들어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활력을 돋아주는 훈풍이어야 한다. 정책은 신중하고, 치밀하고, 진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민초(民草)는 절대 몸을 굽히지 않는다.

마지막 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喪其資斧, 貞凶.
재산(권력)과 도끼가 소실되니, 아무리 옳다고 해도 흉하다.

내 손에 쥐어졌던 권력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칼을 고집하다가는 흉한 꼴을 보게 되어 있다고 주역은 경고한다.

칼과 도끼는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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