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정은이 왕? 그저 과체중"…평양 소설 쓴 英작가 '팩폭'

중앙일보

입력

마르셀 서루가 2018년 평양 방문 중 이발 체험을 하고 있다. 마르셀 서루 본인 제공

마르셀 서루가 2018년 평양 방문 중 이발 체험을 하고 있다. 마르셀 서루 본인 제공

어떤 여행은 인생을 바꾼다. 영국 소설가 마르셀 서루의 2018년 북한 여행이 그랬다. 1968년생인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영문학을, 예일대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한 뒤 작가의 길을 걸어왔다. 뉴욕타임스(NYT)가 “깊이 있다”고 평가한 그의 작품들은 대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SF적인 요소가 짙다. 무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하고 한국에도 소개된 『먼 북쪽』도 그렇다. 그러나 그가 평양과 마식령 스키장 등 북한을 다녀온 뒤 쓴 소설은 색채가 사뭇 다르다. 영어 원제는 『평양의 마법사(The Sorcerer of Pyongyang)』으로, 북한의 한 평범한 소년이 바깥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다. 그의 북한 여행은 작가로서의 그의 새로운 장(章)을 열어준 셈이다. 서루는 중앙일보와 최근 이메일 인터뷰에서 “내게 북한은 이상하면서도 익숙한 곳”이라며 “내가 1980년대 방문했던 구 소비에트연방(소련)과 2018년의 북한은 묘하게 닮으면서 달랐다”고 말했다.

서루의 이름은 프랑스식이지만 그의 출생지는 우간다, 성장 국가는 영국과 미국이다. 유명 여행작가 겸 소설가인 아버지 폴 서루의 영향이다. 예일대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면서 그가 천착한 주제는 소련. 그에게 북한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까닭이다. 서루는 “북한은 실패한 마르크시즘을 숭배하는 지상 최후의 컬트 정권”이라며 “(김일성) 배지부터 전체주의적 포스터, 가혹한 형벌 등, 인간의 마음을 정권이 통제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작동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국가가 통제한다는 것의 비인간성을 마법과 어린 소년이라는 장치를 통해 호소력 짙게 전달한다. 영국 가디언지는 “전체주의 정권의 허상을 잘 짚어낸 수작”이라고 평했다. 2009년엔 전미(全美)도서상 최종후보작으로 선정됐다. 앞서 그는 서머싯모옴 상과 SF 작품에 주어지는 존 캠벨 상 등도 수상했다.

마르셀 서루의 신작 소설 표지. 한국어판은 번역 여부가 미정이다.

마르셀 서루의 신작 소설 표지. 한국어판은 번역 여부가 미정이다.

책의 주인공은 준수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이다. 그는 정권에 충실하게 복종하는 인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눈에 들어 출세하는 것이 최고의 야망인 소년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서구 여행객이 놓고 간 마법 관련 책을 접하게 되면서, 그간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의 허상을 깨닫는다는 게 주요 줄거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글쎄. 2018년 평양 방문 중 우리를 담당했던 가이드가 김일성과 김정은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것이 떠오른다. 그는 김일성이 얼마나 김정은을 사랑했는지를 누누이 강조했는데, 솔직히 (해외 여행객인) 우리에겐 이상하게 들렸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충성을 다하는 주민들에게 김정은은 김일성의 뒤를 잇는 왕이겠지만, 내겐 그저 김정은은 과체중이고 헤어스타일이 이상한 밀레니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원래 소설 제목을 ‘가능성의 집(The House of Possibilities)’이라고 지으려고 했었는데.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나는 가능성에 산다(I Dwell in Possibility)’에서 착안했던 거다. 준수에게, 그 전까지 가능하지 않았던 가능성들이 열렸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2018년 마르셀 서루의 북한 방문은 영국의 한 방송국을 대표해 저널리스트 자격으로 이뤄졌다. 당시 서루의 방문을 동행 카메라맨이 촬영하고 있다. 마르셀 서루 본인 제공

2018년 마르셀 서루의 북한 방문은 영국의 한 방송국을 대표해 저널리스트 자격으로 이뤄졌다. 당시 서루의 방문을 동행 카메라맨이 촬영하고 있다. 마르셀 서루 본인 제공

다큐멘터리 감독 및 작가로도 활동 중인데. 한국 방문의 기억은.  
“2015년 방한해서 염전에서 강제 노동을 하는 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건 한국사회의 아픈 부분일 수 있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그런 점을 해외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이 가진 개방성을 반증한다. 서울과 목포, 부산 등 다양한 도시를 다니며 즐거운 경험도 많이 했고, 무엇보다 한국에 갔던 경험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큰 도움이 됐다. 남북은 이란성 쌍둥이 같다. 낙후된 북한의 모습은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목도한 뒤였기에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북한의 주민들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데도 그 정권이 알 권리를 막으면서 끔찍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북한도 그간 변화해오긴 했다.  
“물론 지난 10년간 북한도, 북한에 대한 내 생각도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궁금증이 있다. 북한 주민들은 실제로 정권을 믿는 걸까. 아무도 이에 대한 답은 할 수 없다. 평양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는 ‘여긴 하나의 거대한 감옥 같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양도 맛있는 피자집이 있고 백화점이며 지하철역이 있는 현대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북한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여줬지만.”  
주인공을 북한 소년으로 설정한 이유는.  
“북한의 주민은 세뇌된 로봇과 같다는 생각들을 서구에선 하는데, 그런 주민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소년이 변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북한 주민은 로봇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휴일엔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며 미래에 대한 야망이 있다. 북한 주민도 우리도 같은 인간이다. 그들의 진짜 내밀한 삶을 그리고 싶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