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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미 통화스와프, 오해와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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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영제 법무법인 광장 고문·전 한국금융연수원장

조영제 법무법인 광장 고문·전 한국금융연수원장

2008년 9월 미국 금융그룹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신용경색이 심해지며 한국 은행들의 해외차입이 갑자기 막혔다. 당시 환율은 1570원까지 치솟았고, 그해 9월부터 연말까지 462억 달러의 외화가 빠져나갔다. 외화대출을 상환하거나 수입대금을 지급해야 할 기업들은 달러를 구하지 못해 큰 애를 먹었다.

외환 당국은 긴장했다. 은행들이 해외차입금 만기가 돌아와도 연장하거나 차환하지 못하면 국가가 보유 외환을 헐어야 한다. 그렇다고 기업들에 빌려준 외화를 회수해 갚도록 하는 것은 실물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어 곤란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해외차입금 만기 연장이 거부되며 보유 외환이 바닥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악몽이 떠올랐다.

갖은 수단을 다 썼으나 소용없었다. 한국 은행들만 해외차입이 막힌 것이 아니라 외국 금융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국회 동의를 받아 해외차입에 대한 국가 지급보증까지 약속했다. 그래도 신용경색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뜻밖의 출구가 나타났다. 미국이 2008년 10월 30일 한국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Swap) 협정을 체결해준 것이다. 이에 따라 12월 2일 한국 은행들에 경쟁입찰 방식의 스와프를 통해 외화가 공급됐다.

2008년 위기 때 통화스와프 역할
금융사·기업 상황 그때와는 달라
지금은 통화스와프 꺼낼 때 아냐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곧이어 외화차입도 재개됐고 환율도 빠르게 진정됐다. 우리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미 통화스와프는 한국 금융시장 안정에 큰 역할을 했고, 두 차례 연장을 거쳐 2010년 10월 종료됐다. 그러다 코로나19 사태 확산으로 글로벌 경기 침체가 다시 시작되자 2019년 10월 재개됐고 다시 두 차례 연장 끝에 지난해 말에 종료됐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40년 만에 찾아온 고물가를 잡기 위해 양적 완화를 종료하고 양적 긴축에 나서면서 빅스텝과 자이언트스텝 등 빠른 행보로 금리를 속속 올리고 있다. 덩달아 달러화 가치가 오르면서 다른 주요국 통화가치는 큰 폭으로 내렸다. 한국 원화도 연초에 달러당 1100원대였는데 최근엔 1400원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미 통화스와프를 왜 종료시켰느냐며 당국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지금이라도 한·미 통화스와프 협상에 나서라거나 한·미 정상회담 의제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통화스와프는 미국의 역외 달러 시장에서 형성된 유동성 경색이 미국의 국내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끼쳐 미국 기업과 가계에 신용경색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유동성 공급장치로 활용된다. 통화스와프 대상국도 글로벌 달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미국 경제에 대한 중요도, 중앙은행 독립 등 건전한 정책 운용 여부 등을 두루 따져 미 연준이 결정한다.

이런 기준에 따라 2008년 10월 미 연준은 멕시코·브라질·싱가포르·한국 등 4개국 중앙은행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연준은 이들 국가가 상당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갖고 있고, 저물가와 균형적인 경상수지로 건전한 정책을 추진 중이며, 이들 시장에서 유동성 경색이 심화하면 미국으로 전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들었다.

지금은 미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넘쳐난 달러 유동성을 강도 높게 회수해야 할 입장이라 이와 역행하는 통화스와프를 해줄 여건이 아니다. 대부분의 주요국 중앙은행이 모두 금리를 올리고 있고, 미국 달러화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통화 가치가 모두 절하되는 상황에서 한국만 위기상황에 직면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금융회사나 기업들이 해외차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우리가 섣불리 통화스와프 필요성을 거론하면 외국에서는 오히려 한국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볼 수 있다. 최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미 연준과 긴밀하게 정보 교환을 하고 있고, 연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적절한 타이밍에 결정할 것이라며 통화스와프 논의에 선을 그었다.

지금은 보유 외환도 충분하고 자본유출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해외투자자산도 많은 상황에서 우리가 통화스와프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은 시장의 안정을 위해 자신감이 필요한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영제 법무법인 광장 고문·전 한국금융연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