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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물결’이 일지 않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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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귀가 얇은 편이다. A 말을 들으면 맞는다고 생각하다가 B 말을 들으면 그 또한 일리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최근 조지아주에서 미국 중간선거를 취재할 때도 그랬다. 애틀랜타에 사는 33세 민주당원 에밀리는 이번 선거를 공화당의 낙태권 반대를 심판할 기회로 봤다. 낙태 규제 발상은 “진료실에 임신 여성, 의사, 정부, 3인이 모여 공동 결정을 내리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불복론자’들이 대거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건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봤다.

소도시 링골드에 사는 60대 공화당원 셜리는 낙태는 핵심 당사자인 뱃속 태아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키울 형편이 안 되면 낙태할 게 아니라 사회적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성폭행당한 딸이 낳은 손주를 키운 자신의 사연을 들려줬다. 그는 “국경을 열어 놓고 불법 이민을 받는 것은 법치에 어긋난다”며 “국경을 열어 놓는 나라가 어딨나. 한국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중간선거가 열린 지난 8일 밤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중간선거가 열린 지난 8일 밤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둘은 다른 행성에서 온 듯 달랐다. 팽팽한 의견은 선거 결과로 확인됐다. 상원은 민주당(무소속 포함)이 50석을 확보해 공화당(49석)을 겨우 눌렀다. 하원은 공화당 탈환이 유력하지만, 의석 차이는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붉은 물결(공화당 압승)’은 일지 않았다. 패인 분석이 활발하다. 지난여름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가 젊은층 투표율을 높였고 민주당 지지자들을 결집했다.

결정적 요인은 트럼프다.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충성파를 후보로 밀었고, 이들은 펜실베이니아·애리조나·네바다 등 경합주 상원 선거에서 모두 졌다. 트럼프의 재등장에 대한 두려움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을 눌렀다. 통상 중간선거는 현직 대통령 정책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다. 그래서 야당에 유리하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첫 임기에 하원에서 52석을, 버락 오바마는 63석을 잃었다. 이번엔 현직 대통령이 아니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심판론이 제기되면서 이런 공식이 깨졌다.

미국 사회가 어느 때보다 분열됐기 때문에 애초에 공화당 압승은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민주당은 인플레이션이 심해도 민주당을 찍고, 공화당은 트럼프의 흠을 알면서도 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견고한 양당 구도에서 공화당은 중도 성향 민주당원이나 무당파를 설득해야 승산 있다. 하지만 야당에 힘을 실어주고 집권 정부에 긴장감을 주는 ‘건전한 중간자’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미국만큼 분열된 한국의 다음 선거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