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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초대형 코인 스캔들…암호화폐 겨울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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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가상자산 거래소인 FTX는 ‘코인 세계의 롤스로이스’로 불렸다.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과 미식축구 톱스타 출신인 톰 브래디, NBA 슈퍼스타 스테펀 커리 등 유명 인사들이 투자한 곳이어서다. 닉네임이 같아서 있지, FTX 사태가 터지자마자 1997년 헤지펀드 롱텀캐피털 사태가 소환됐다. 파산 직전 롱텀캐피털도 ‘헤지펀드계 롤스로이스’로 불렸다. 미 재계의 유명인사들이 롱텀에 거액을 맡겨서다.

FTX가 지난주 미국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올해 들어 두 번째 블록체인계 스캔들이다. 첫 번째는 올해 봄에 발생한 루나-테라 사태다.

봄에 터진 루나 - 테라 사태 이어
‘코인계 롤스로이스’ FTX 침몰
앞에선 “투명성” 뒤에선 시세조종
믿음 깨진 블록체인…파장 분위기

미 블록체인 컨설팅회사인 디파이커스터디 김혜린 애널리스트는 13일 기자와 통화에서 “FTX 창업자는 가상자산 세계의 아이콘이었다”고 말했다. 그럴 만했다. FTX는 소프트뱅크, 세코이어 캐피털, 블랙록 등 유명 투자회사와 자산운용사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코인 세계에서 제도권 펀드의 투자를 받았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징표다. FTX 가치가 한때 320억 달러(약 42조)에 이를 정도였다. 현대차 시가총액보다 5조원 정도 컸다.

FTX 잘나갈 때 가치 42조원

글로벌 3대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 FTX 파산 여파로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가격이 급락세를 보인 14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지원센터에 비트코인 시세가 나오고 있다. [뉴스1]

글로벌 3대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 FTX 파산 여파로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가격이 급락세를 보인 14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지원센터에 비트코인 시세가 나오고 있다. [뉴스1]

이랬던 FTX 금고에 남아 있는 유동성 자산은 9억 달러(약 1조1700억원)다. 반면 갚아야 할 돈은 90억 달러 정도다. 빚잔치하고 나면 주주가 챙겨갈 게 없다. 그 바람에 손정의가 투자한 1억 달러가 허공으로 사라졌다는 등 ‘부호들의 사연’이 시시각각 전해진다. 그런데 FTX 투자자 리스트에 롤스로이스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미 온타리오주 공무원연기금이 들어 있다. 금융 스캔들이 발생하면 늘 드러나는 안타까운 사연이다. FTX 침몰은 루나-테라 사태와 함께 원·투 펀치다.

블록체인 생태계가 흔들리고 있다. 김혜린 애널리스트는 “암호화폐 아이콘이 추락해 블록체인 세계가 충격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로 미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샘 뱅크먼-프리드

샘 뱅크먼-프리드

실제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30·사진)는 코인 세계의 신뢰를 대표했다. 평소 그는 “블록체인은 독점이나 중앙집권이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열린 네트워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선재단을 세워 코인으로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미 시민단체인 책임정치센터에 따르면 2020년 대통령 선거 시기에 500만 달러 이상을 바이든 진영에 기부했다. 개인 기부자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돈이었다.

프리드는 암호화폐 세계의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년)으로 통했다. 모건은 금융그룹 JP모건의 창업자다. 월가가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른 시기인 1870~1913년 미국 돈줄을 쥐락펴락했다. 프리드를 모건에 비유한 이면에는 암호화폐 세계의 소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모건이 19세기 말 세계 금융중심으로 떠오르는 월가의 신뢰성을 높였듯이, 프리드가 신종 자산인 코인의 신뢰를 높여주는 아이콘으로 구실해주기를 블록체인 세계 사람들이 원했다는 얘기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금융역사를 보면 영웅의 몰락은 ‘환멸의 순간’의 시작이곤 했다. 신종 자산 또는 기술, 패러다임을 상징한 인물이 추락하면 투자침체로 이어졌다. 이른바 ‘○○ 겨울(winter)’로 불리는 시기다. 이미 미 현지엔 조짐이 나타났다. 기대와 믿음으로 가득했던 블록체인 세계가 파장 분위기로 가득하다. 그 바람에 ‘암호화폐 겨울(Crypto Winter)’이 조만간 현실이 될 전망이다.

비트코인 급락이 몰락의 서막

사실 암호화폐 겨울이 올 것이란 예측은 올해 초부터 제기됐다. 대표 자산인 비트코인 가격이 급락해서다. 하지만 이는 가격만을 변수로 보는 단순한 시나리오였다. 금융 역사를 보면 환멸의 순간은 가격 하락만으론 찾아오지 않았다. 1820년대 영국의 주식회사 설립붐, 1840년대 철도붐, 1870년대 남미붐 …. 2000년대 닷컴 거품 등엔 ‘영웅의 몰락’이 빠지지 않았다. 영웅은 대중 앞에선 늘 ‘신뢰’ ‘새로운 세상’ 등을 목놓아 외쳤다. 반면 뒤에서는 시세 조종 등 향기롭지 않은 작업을 하다 운명적인 순간에 들통났다.

이번 FTX 몰락에도 같은 패턴이 엿보인다. 프리드는 FTX의 자체 코인인 FTT를 발행해 팔았다. FTT 가격이 높을수록 FTX가 이익보는 구조다. 시세 조종이 발생하기 딱 좋은 조건이다. 아니나 다를까. 프리드가 트레이더 시절에 세운 펀드가 FTT를 대거 매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1960년대 한국 증권거래소가 자사 주식을 시세 조종한 사건(대증주 사태)이 2022년 코인세계에서 되풀이된 느낌이다.

정말 역설적이다. 블록체인은 모든 거래 내용을 네트워크 참가자들이 공유하거나 열람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인류가 상거래를 시작한 이후 시달리고 있는 ‘상대가 약속을 지킬까?’라는 불안감을 해결해줄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로 상찬됐다. 옹호자들은 ‘투명성’ ‘신뢰’ ‘열린 공간’ 등의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기존 금융 시스템을 ‘불투명’ ‘불신’ ‘닫힌 세계’ 등의 딱지를 붙이곤 했다. 이런 블록체인 세계에서 올해 들어서만 대형 스캔들이 두 차례 터졌다. 코인 세계에 겨울이 다가올 조건이 모두 충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