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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술이 예술을 만났을 때, 치유의 힘은 더 커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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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11일 개막한 푸른문화재단의 ‘아르스 롱가’ 전시는 의술이라는 주제에 맞게 전시장도 병원처럼 꾸몄다. 남수현 기자

11일 개막한 푸른문화재단의 ‘아르스 롱가’ 전시는 의술이라는 주제에 맞게 전시장도 병원처럼 꾸몄다. 남수현 기자

‘아르스 롱가(Ars Longa)’라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하얀 벽에 연노랑 띠가 둘러진, 한눈에 봐도 병원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병원 수납창구처럼 꾸며진 카운터에서는 하얀 의사가운을 입은 이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소화기내과·신경안과·산부인과 등 병원 분과를 표시한 곳곳의 팻말이 실제 병원을 방불케 한다.

지난 11일부터 서울 용산구 갤러리SP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아르스 롱가’는 공간부터 ‘예술과 의술의 만남’이라는 기획 취지를 십분 드러낸다. 전시 제목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아르스 롱가, 비타 브레비스(Ars Longa, Vita brevis)’, 즉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유명한 경구에서 착안했다.

목발 짚은 사람을 형상화한 오화진의 설치작품. 남수현 기자

목발 짚은 사람을 형상화한 오화진의 설치작품. 남수현 기자

전시를 기획한 푸른문화재단의 구혜원 이사장은 “이 문장에서 ‘아르스’는 본래 ‘예술’이 아닌 ‘의술’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을 치료하는 기술인 의술을 익히고 베푸는 길은 끝이 없다는 의미”라며 “전시는 ‘아르스’의 중첩된 의미처럼, 의술과 예술 모두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고, 삶에 풍요를 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전시 콘셉트에 따라 25명의 작가가 내놓은 장신구 및 가구·오브제·설치 작품 150여 점을 병원처럼 설계된 전시장 구석구석에서 만나볼 수 있다.

처음 마주하게 되는 이재익 작가의 작품은 ‘소화기내과’로 분류돼있다. 재생 가죽을 작게 잘라 이어 붙여 만든 형태가 위장 등 인간의 소화기관을 닮았다. 언뜻 열매나 과일처럼 보이기도 하는 형상에서 살아 숨 쉬는 세포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건너편 ‘신경안과’에는 분명 고정된 아크릴 브로치인데 꿈틀거리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김한나 작가의 작품이 자리한다. 흑과 백 등 대비되는 색깔을 규칙적으로 교차시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왜곡해 지각하게 되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표현했다.

석고붕대로 자궁을 표현한 조민정의 브로치. [사진 푸른문화재단]

석고붕대로 자궁을 표현한 조민정의 브로치. [사진 푸른문화재단]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산부인과·호흡기내과, 왼쪽으로는 내분비대사내과·피부과가 기다리고 있다. 조민정 작가는 석고붕대라는 의학적인 재료를 이용해 여성의 자궁을 표현했다. 얇고 부서지기 쉽지만 환부를 고정할 정도로 단단한 석고붕대의 특성을 통해 부드럽고 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이미지, 따뜻한 동시에 엄격한 모성 등 이중적인 여성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성코코 작가의 오브제와 브로치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지배하는 각종 호르몬을 표현해 내분비대사내과로 분류됐다. 뇌의 한 가운데에서 행복감을 담당하는 도파민, 온갖 달콤한 유혹에 둘러싸인 인슐린, 흥분 상태의 아드레날린 등 각각의 호르몬을 캐릭터로 표현한 모습이 익살스럽다. 이선용 작가는 인간 피부와 가장 비슷한 재료라는 실리콘으로 코로나19 기간 결여됐던 촉감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장신구를 선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면 작가의 지문과 피부 결이 생생히 보여 피부끼리 접촉할 때의 감각이 시각적으로 체험된다.

보석을 알약처럼 만든 김유정의 작품. [사진 푸른문화재단]

보석을 알약처럼 만든 김유정의 작품. [사진 푸른문화재단]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전시장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정형외과 오화진 작가의 조형물이 눈에 띈다. 위층 천장에서부터 이어지는 목발 짚은 사람 형태의 이 설치작품은 신체적 고통에 굴하지 않는 욕망이 생을 지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버려진 의료용품을 재활용한 이미리 작가의 귀걸이들은 여러 개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설치돼 나무에 천을 늘어뜨려 소원을 빌던 성황당을 연상케 한다. 쓸모가 다한 물체에 깃든 이야깃거리에 귀 기울이려는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튜브 안에 적혈구를 연상시키는 합성 루비를 넣어 인체의 순환 시스템을 표현한 ‘서큘레이션’(민준석), 장미수정·사금석 등을 깎아 알약 형태로 만든 ‘알약 시리즈’(김유정) 등 보석을 활용한 작품들도 있다. 단테의 『신곡』을 모티프로 생과 사의 장면들을 제시한 도자기 오브제 ‘신곡’(이윤희),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등의 상징물을 조합한 브로치(김아랑) 등 신화적·철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도 흥미롭다.

성코코 ‘도파민’. [사진 푸른문화재단]

성코코 ‘도파민’. [사진 푸른문화재단]

이번 전시는 2018년부터 매년 특정 주제의 공예 기획전을 열고 있는 푸른문화재단의 다섯 번째 전시다. 2020년에는 추상을 주제로 한 공예품을 모은 기획전을 열었고, 지난해에는 전통 혼례 장신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 ‘연리지’를 기획했다.

매해 전시에 기획자로 나서고 있는 구혜원 이사장은 이번 전시 개막일에도 직접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이 분야에서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국인데, 그만큼 인정을 못 받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런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이라며 “이번 팬데믹을 거치며 너무나 고생한 의료인들에게도 웃음을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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