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의 자녀 학자금, 무상지원인가 대출인가…대법, 1·2심 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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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공사는 직원들에게 자녀 학자금(대학교 등록금)을 무상 지원하다 1998년 감사원의 지적을 받고 무이자 대부로 전환했다. 대신 사내근로복지기금이 직원들에게 학자금 상환액을 전부 지급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무상 지원을 이어갔다. 이에 감사원은 2008년 한전에 자녀 등록금을 복지기금에서 무상으로 지원하지 말라고 재차 주의를 줬고, 한전은 노사 합의를 통해 성적에 따른 장학금 제도로 전환해 운영해 왔다. 회사로부터 대부받은 자녀 학자금 상환금을 복지기금이 성적 장학금 형태로 지원해주던 제도다.

한전 직원들은 복지기금을 통해 자녀 등록금 대부액을 상환하면서 사실상 전액 또는 일부를 무상으로 지원받는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한전은 퇴직자들의 급여에서 향후 복지기금이 장학금으로 지원할 예정이던 자녀 등록금 상환액을 공제했다. 이에 한전 퇴직자들은 “대부계약이 통정허위표시(상대방과 짜고 한 가장행위)로서 무효이고, 그 실질은 직원들의 학자금 전액 무상 지원이므로 급여에서 대부 상환금을 공제하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한전을 상대로 채무부존재 확인 및 공제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5월 13일 서울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본부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 5월 13일 서울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본부의 모습. 연합뉴스

원심(1, 2심)은 “복지기금에서 지원이 예정된 금액에 대해선 퇴직자들이 한전에 대출금 상환 의무가 없다”고 봤다. 원심 재판부는 “직원들이 한전과 대부계약을 체결하고 대부금을 받을 당시의 자녀 학자금 대부와 관련된 한전 및 복지기금의 각 규정의 내용이 대부계약에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퇴직자들이 자녀 학자금을 대부받을 당시 관련 규정에 따라 대부금 중 복지기금에서 지원되는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만 한전에게 상환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 지난달 27일 “원심 판단은 법률행위의 해석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은 직원들이 자녀 학자금을 대부받을 당시 작성·제출하는 대부신청서·차용증서 등 처분 문서에 주목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 처분문서에 기재된 문언대로 직원들과 한전 사이에 학자금에 관한 소비대차(消費貸借·금전 등의 소유권을 이전하고 그와 같은 종류·품질·수량으로 반환받음)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다. 이 처분문서에는 복지기금 지원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퇴직 시 미상환금 전액을 상환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원심 재판부는 차용증서에 기재된 ‘관련 규정’에 장학금 지원에 관한 복지기금의 규정이 포함된다고 봤지만, 대법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법은 “‘학자금 업무처리지침’ ‘장학금 업무처리편람’ 등 취업규칙은 한전과 독립된 별개 법인인 복지기금에는 효력이 미치지 않고, 한전 역시 복지기금 내부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점에 비춰보면, ‘관련 규정’은 장학금 업무처리편람 등을 의미한다”고 판시했다. 애당초 복지기금이 자녀 학자금 전액 또는 일부에 대한 상환 책임을 떠안는다는 내용이 대부계약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원심 재판부는 ▶복지기금 지원금이 급여 내 상환금 공제와 연계해 지급됐고 ▶직원들이 대부금 잔액을 조회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에 복지기금 지원예정액이 별도로 표시됐으며 ▶복지기금 운영에 관한 실무 처리는 한전 노무처에서 담당한 점 등을 판단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대법은 “이 같은 사정만으로는 대부계약 체결 당사자들의 의사가 ‘직원들이 대부금 중 복지기금에서 지원하는 금액에 대해선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부계약의 해석은 모든 상황에서 일률적일 수 없으므로, 계약이 체결된 경위나 목적, 처분문서의 내용, 당사자의 의사 등 개별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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