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징집통지서 왔다…韓난민 신청한 러 청년 '끔찍한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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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에 어긋나는 잘못된 전쟁이잖아요. 받아들일 수 없는 전쟁입니다.”
 지난 9월 중순 비행기 편으로 한국에 들어온 30대 러시아인 이바노프(가명)에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정부에 대한 반감이 뚜렷했다. 이바노프는 중앙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지난 봄 전쟁 발발 이후 친구들과 함께 전쟁 반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가 겪은 일을 “끔찍한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7개월간 국내에서 들어와 난민신청을 한 러시아인은 537명이다. 지난해까지 국내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해 달라고 신청하는 러시아인이 100명 미만이었던 것에 비하면 급증세다. (※법무부 통계에서 난민 신청자 중 러시아인의 수는 미미해 ‘기타’로 분류된다. 지난해 5번째로 많았던 파키스탄인 난민 신청자가 131명이었다.)

이바노프의 고향은 러시아 부랴티야다. 시베리아 바이칼호 동쪽에 있는 부랴티야는 인구(약 98만명)의 30%가량이 몽골계열인 부랴트인이다. 남쪽으로 몽골과 국경을 맞대고 고려인이 많이 사는 중앙아시아와 근접해 있다. 이 때문에 이바노프는 한국 전통문화를 지켜온 고려인 친구들과 어울려 자랐다.

부분 동원령 피해 택한 한국행

 지난 6월 1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40여Km 떨어진 콜론시나의 한 가정집에서 이 집의 가장 세르게이 모졸(50) 씨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모졸 씨는 2022년 2월 말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나라와 자신의 동네를 지키는 것을 자원해 러시아군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 업무와 여러가지 수송 업무를 수행하다가 지난 3월 4일 실종됐다. 그의 시신은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동네 근처 숲속에 방치된 채 지난 6월 14일 동네 주민들로 구성된 수색대에 발견됐다. 아내와 두 딸의 아버지로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보석 관련 사업가였던 그는 전쟁의 또다른 피해자로 남아 이날 영면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1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40여Km 떨어진 콜론시나의 한 가정집에서 이 집의 가장 세르게이 모졸(50) 씨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모졸 씨는 2022년 2월 말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나라와 자신의 동네를 지키는 것을 자원해 러시아군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 업무와 여러가지 수송 업무를 수행하다가 지난 3월 4일 실종됐다. 그의 시신은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동네 근처 숲속에 방치된 채 지난 6월 14일 동네 주민들로 구성된 수색대에 발견됐다. 아내와 두 딸의 아버지로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보석 관련 사업가였던 그는 전쟁의 또다른 피해자로 남아 이날 영면했다. 연합뉴스

 대학을 졸업 후 최근 어렵사리 직장을 구해 다녔다는 이바노프의 희망은 지난 2월 24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고 부랴티야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왜 의미 없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BBC 등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러시아군 전사자 6000여명 중 부랴티야 등 소수민족 출신이 600여명이지만 모스크바 출신은 15명뿐이었다고 한다. “곧 징집령이 내려지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여름부터 돌았다.

이바노프는 “이러다간 꼼짝없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 끝에 출국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랴티야인들 중에서 전쟁 사망자들이 많이 나왔다”며 “일부 미디어들까지 폐쇄하는 등 국내의 긴장도가 높아지면서 정부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둘 러시아를 뜨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난민심사에 회부되지 못한 외국인들은 인천공항국제공항에 머무르며 '공항난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온 공항난민 A씨가 지난해 2월 인천국제공항 환승센터의 한 구석에 위치한 쇼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모습. 사진 A씨 제공

난민심사에 회부되지 못한 외국인들은 인천공항국제공항에 머무르며 '공항난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온 공항난민 A씨가 지난해 2월 인천국제공항 환승센터의 한 구석에 위치한 쇼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모습. 사진 A씨 제공

이바노프도 지난 9월 초 탈출을 시도했다. 먼저 비행기로 국경을 맞댄 몽골로 이동한 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사는 고려인 친구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입국장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난민신청을 했지만,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은 정식 심사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으려는 등 난민 인정 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난민 인정 심사 앞뒀지만…

이바노프는 출입국당국과의 인터뷰 후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통지서를 받았다. 사진 난민인권센터

이바노프는 출입국당국과의 인터뷰 후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통지서를 받았다. 사진 난민인권센터

 그 사이 러시아에 있는 집엔 정부의 징집 통지서가 도착했다고 한다. 9월 2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체 예비군 2500만 명 중 30만 명을 징집하겠다고 내린 부분 동원령의 결과였다. 러시아로 돌아가면 강제 징집돼야 하는 처지다. 이바노프는 지난 9월 29일 난민인권센터의 도움을 받아 “난민신청불회부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달 12일 출입국 당국이 결정을 뒤집고 이바노프를 난민심사에 회부하기로 하면서 한숨을 돌렸다. 인천국제공항 밖으로 나온 이바노프는 국내 고려인 친구 집에 머무르면서 난민 인정 심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바노프가 난민으로 인정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러시아인 난민신청이 급증 추세지만 아직 난민 지위가 인정된 사례는 없다. 법무부 관계자는 “올해 난민 신청자 대부분에 대한 심사가 아직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난민인권센터가 법무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난민 신청자가 1차 심사 결정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23.9개월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인해 전년 대비 평균 심사 기간이 늘었다는 게 법무부의 설명이다.

이바노프는 최근 난민인권센터에 “나는 전쟁이 두려워서 도망친 게 아니다”라고 거듭 말했다고 한다. 1년에 걸쳐 군 복무를 한 사실을 강조하면서다.그는 “다른 나라 땅에서 죽고 싶지 않고 지지하지 않는 정부 이익을 위한 전쟁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는 부패와 비민주적 상황으로 가득 차 있다”며 “국제사회의 관심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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